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인수문고의 인흥마을
목화씨로 유명한 고려말의 충신
삼우당 문익점은 남평문씨의 중시조인데 그 후손이
대구에 입향한 것은
약 5백년 전으로 전해지며 이 곳
인흥에 자리를 잡은 것은 그의 18세손인 인산재 문경호(1812~1874)가
문씨만의 마을을 계획하고 원래
고려때의 대찰 인흥사가 있던 곳에 터를 잡고 인흥마을을
만들었습니다.
인흥마을은 정전법 구도로 형성하였으며 현재는 조선말 전통가옥 9채, 재실 1채, 정사 1채, 문고 1채가
있으며, 비록 200년 미만의 짧은 역사의 마을이지만 전통적인 영남지방 양반가옥의 틀을 가지고 있고
마을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민속자료 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은 간밤부터
엄청나게 많은 비가 쏟아지고 있다는데
대구에는 흐리던 날씨가 인흥마을로
출발하자 추적추적 가랑비를 흩뿌리기 시작합니다.
사실 사진을 찍기가 번거러워서 그렇지
적당한 빗속에서 절집이나 전통마을을 답사하는 맛은 제법 쏠쏠합니다.
국내에서 제법 많은 곳을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멋진 인흥마을을 이번 대구여행에서 새롭게 알았습니다.
차에서 내리니 그저 평범한 밭이
있는데 이 마을 일대가 고려때의 대찰 인흥사가 있던 자리랍니다.
그럼 멀리 작은 탑이 보이는데
폐사지의 유물인가?
인흥사는 일연스님이 중건했으며 여기서 삼국유사를 집필했다고하니 역사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겠네요.
참고로 인흥사는 일연스님이
1264년에 포항 오어사에서 여기로 와서 중건한 절인데 임진왜란때 불탔답니다.
수령이 3백년이 된
회화나무인데 높이가 12m로 세거지 한 가운데에
있으며 웅장하고 아름답고,
좋은 곳에 터를 잡아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도록
한 입향조 인산재 문경호를 기리기 위해 문경호나무라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회화나무는 일명 선비나무 혹은 학자나무라고 알려져 있답니다.
담장의 높이는 상당히 높은 편으로
흙과 돌을 이용해 쌓았는데 고졸한 맛이 있습니다.
담장에 핀 능소화
남들 찍을때 뭐 했는지? 왜 내 눈엔 이토록 예쁜 능소화가 안 보였었는지?
같이 간 일행 형님이 찍은 사진을 받아서 올립니다.
한옥과 담장, 정원의 어우러짐이
멋스러워요.
세거지 좌우에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는 노송들이 장관인데 천연기념물 제 249호로 지정됐습니다.
인흥마을의 대표건물로는 광거당, 수봉정사, 인수문고를 꼽는데 이제 광거당부터 보도록
하죠.
광거당은 1910년 후은공 문봉성 부자가 지은 재실로 문중 자제들의 수학공간으로서
오늘날의
학교기능을 담당했던 시설이며 , "丁"자형으로 정면 4칸, 측면 5칸의 겹처마팔작지붕
건물입니다.
누마루는 한 칸이 돌출되어 형성돼 있으며 건물이 "丁"자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수석과 묵은 이끼와 연못이
있는 집"이란 뜻이라네요.
누마루-비도 오고 목침도 보이고 책 좀 읽다가 한 숨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어요.
고산경행루-"높은 산의 경치를 보는
집"이란 뜻이가요?
광거당
편액
헛담-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낮은 기와토담인데 매우 독특하게
느껴졌구요.
정원을 바로 마주치지 않도록 만들었다는데 현대 아파트의 중문같은 역할이라고생각해도
될런지?
대문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헛담인데 기와로 만든 나무잎 하나가 전체를 지루하지 않게 해주는데
그 조형미에 감탄합니다.
안에서 걸어 잠그는 대문의
모습
거북의 형상으로 나무를 조각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재미있고 무슨 뜻이 담겨 있는지
궁금합니다.
수봉정사-일명 수백당이라고도 부르는데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기도 하고
문중의 모임을 위해 건립된 정사로
문중 자제들의 배움터이자 학문을 논하던 곳으로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구조로
특히 정원이 아름다웠습니다.
여기 현판에는 수백당이라고 씌어 있군요.
이번 대구여행에서 인수문고를 보고
저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문중에서 이렇게 규모가 큰
사설 문고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 신문물과 신학문을 받아 들이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투자하는 학문에 대한
열의와 깨어 있는 사고에 저으기 놀라고 충격을 받았던 겁니다.
흔히 대구, 경북 지역을 보수도 앞뒤 가리지 않는 맹목적 보수라고해서 꼴보수라
부릅니다.
그러나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한 지역이 아니러니하게도 안동과
대구지역입니다.
아마 1970년대까지 그 훌륭한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으나 지역색으로
이득을 챙기려는
정치야합꾼들로 인해 독립운동이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던 숭고한 정신이 말살됐던
것이죠.
이러한 정신적 토양이 있었기에 문영박과 같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할 수 있었겠죠.
이 많은 서적과 목판을 중국에서 뱃길로 목포까지 옮긴후 대구까지의 육로는 소나 말을
이용했다니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 남평문씨 문중의 열의에 감탄할 뿐입니다.
http://blog.daum.net/justbig/1720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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