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흥마을이란 곳이 있습니다.
이제는 대구광역시로 포함된 달성군 화원읍 본리라는 곳인데, 이 곳에 잘 지은 한옥집들이 몰려있는 동네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옥마을이라도 다른 한옥마을과는 좀 다른 마을입니다.
마을 입구에는 근사한 솟을대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옆으로는 뒤쪽에서 나오는 골목 입구가 따로 있습니다. 이 고샅 부근이 아주 멋집니다.
이 골목길이 이 마을의 진짜 볼거리입니다.
정성껏 쌓은 전통 담장은 그 어떤 건축물보다도 아름답습니다. 이 마을의 담장은 돌로 쌓은 돌담이나 무늬로 멋을 낸 꽃담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흙과 돌로 정성스럽게 쌓은 모습이 바로 눈을 잡아끌고, 통일된 분위기가 그윽합니다.
신목으로 보이는 큰 나무가 있는 어귀쪽 골목입니다.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씨여서 물기에 젖은 담장이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왕유의 시 구절 `객사청청류색신'이 떠오르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마을 담장은 사진으로 보면 다른 전통 마을 담장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보여도 실제로 가보면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높이'입니다.
이 마을 담장은 높습니다. 보통 우리 전통 담은 바깥에서 보면 마당 안 집들의 지붕이 어느 정도 보이면서 사람은 대충 가려집니다. 도둑을 막겠다거나 자기 집을 외부와 차단하겠다는 의미보다는 사생활을 보호하면서 공간을 나누는 것에 충실합니다.
하지만 이 마을 담장은 도저히 담너머로 볼 수 없을 정도로 키가 큽니다.
그런데, 이 마을 담장은 사진으로 보면 다른 전통 마을 담장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어보여도 실제로 가보면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높이'입니다.
이 마을 담장은 높습니다. 보통 우리 전통 담은 바깥에서 보면 마당 안 집들의 지붕이 어느 정도 보이면서 사람은 대충 가려집니다. 도둑을 막겠다거나 자기 집을 외부와 차단하겠다는 의미보다는 사생활을 보호하면서 공간을 나누는 것에 충실합니다.
하지만 이 마을 담장은 도저히 담너머로 볼 수 없을 정도로 키가 큽니다.
그리고, 다른 동네와 달리 담장과 골목이 모두 직선입니다.
우리 전통 가옥이나 마을은 기본적으로 구획이 직선으로 나뉘어지지만 지형에 따라 부드럽게 곡선을 이루기도 하고, 또 집과 집 사이도 이렇게 도심 골목처럼 붙어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마을은 담장이 만들어내는 길이 자로 잰 것처럼 직선이고 길게 만들어졌습니다. 담장만 시멘트나 벽돌로 바꾸면 도시 중산층 단독주택 지역 골목이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 인흥마을 골목길은 다른 전통 마을에서 볼 수 없는 시원하고 웅장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주 근사하죠?
그런데, 왜 이 마을 골목은 이렇게 다른 걸까요?
그건 이 마을이 아주 오래된 마을이 아니라 1840년대 들어선 마을이고, 집들은 대부분 조선후기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때 지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한옥으로 지은 `근대의 마을'인 거죠.
19세기말 20세기초 우리나라 도시의 모습은 크게 바뀝니다. 일본인들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들어와 새로운 주거단지를 형성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적 변화에 맞게 한옥 마을도 나름 근대적인 변화를 보여준 곳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전통적이면서도 다른 분위기의 마을이 된 것입니다.
동네 입지도 다른 마을과 다릅니다. 보통 기와집 마을은 산기슭 완만한 경사에 짓는 편인데, 이 마을은 완전히 평지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네모 반듯하게 땅을 나눠 집을 지었습니다.
그럼 이 마을은 어떤 곳이냐, 바로 목화씨를 들여와 한반도의 옷문화를 바꾼 문익점의 후손들인 남평 문씨들이 모여사는 마을입니다. 그래서 보통 `남평 문씨 세거지'라고 부릅니다. 현재 9가구가 살고 있다고 안내판에는 써있는데 문희갑 전 대구시장도 공직을 마친 뒤 이 동네에 들어와 살고 있다고 들었으니 10집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잘 지은 한옥들이 있는 근대화된 마을이란 점에서 조선시대판 향린동산이라고 할까, 일종의 타운하우스처럼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 마을이 자랑하는 건물들을 보겠습니다. 맨 먼저 본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갑니다.
잘 꾸민 정원이 나오고, 딱 보기만해도 풍채가 당당한 큰 건물이 등장합니다. 인흥 문씨마을의 간판스타 건물인 `수봉정사' 또는 `수백당'이라고 부르는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마을 담장이 다른 곳보다 높고 크듯이 우리 전통 건물들의 기본 규격보다 더 크게 지었습니다. 툇마루에 앉으면 발이 기단에 닿지 않을 정도로 높고, 기둥들도 아주 큼직큼직 시원시원합니다. 마을 공동의 배움터이자 커뮤니티 센터 역할을 하는 건물인데, 몇 집 안되는 마을에서 이 정도 건물을 지었다는 점에서 마을의 당시 경제력과 스케일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이 지어진 것은 1930년대라고 합니다.
동네 입지도 다른 마을과 다릅니다. 보통 기와집 마을은 산기슭 완만한 경사에 짓는 편인데, 이 마을은 완전히 평지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네모 반듯하게 땅을 나눠 집을 지었습니다.
그럼 이 마을은 어떤 곳이냐, 바로 목화씨를 들여와 한반도의 옷문화를 바꾼 문익점의 후손들인 남평 문씨들이 모여사는 마을입니다. 그래서 보통 `남평 문씨 세거지'라고 부릅니다. 현재 9가구가 살고 있다고 안내판에는 써있는데 문희갑 전 대구시장도 공직을 마친 뒤 이 동네에 들어와 살고 있다고 들었으니 10집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잘 지은 한옥들이 있는 근대화된 마을이란 점에서 조선시대판 향린동산이라고 할까, 일종의 타운하우스처럼 보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 마을이 자랑하는 건물들을 보겠습니다. 맨 먼저 본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갑니다.
잘 꾸민 정원이 나오고, 딱 보기만해도 풍채가 당당한 큰 건물이 등장합니다. 인흥 문씨마을의 간판스타 건물인 `수봉정사' 또는 `수백당'이라고 부르는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마을 담장이 다른 곳보다 높고 크듯이 우리 전통 건물들의 기본 규격보다 더 크게 지었습니다. 툇마루에 앉으면 발이 기단에 닿지 않을 정도로 높고, 기둥들도 아주 큼직큼직 시원시원합니다. 마을 공동의 배움터이자 커뮤니티 센터 역할을 하는 건물인데, 몇 집 안되는 마을에서 이 정도 건물을 지었다는 점에서 마을의 당시 경제력과 스케일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이 지어진 것은 1930년대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계급과 직위에 따라 지을 수 있는 규격이 정해져있었습니다. 조선 왕조가 망한 뒤에는 이런 기준들이 사라져 돈있는 집들은 예전에는 지을 수 없었던 크고 화려한 집들을 많이 지었습니다.
이 건물도 그 중 하나인데, 우리 전통 한옥이면서도 일본 목수가 참여한 것이 아닐까 싶은 색다른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변화와 시도가 재미있는 것이겠죠.
부분 부분 모두 넓고 시원합니다.
부분 부분 모두 넓고 시원합니다.
이 수봉정사와 함께 이 마을을 대표하는 또다른 건물로 가보겠습니다. 이 집을 나와 뒷편으로 가는 골목 끝에 있는 `광거당'이란 집입니다.
다시 인상적인 흙돌담 골목을 가로질러갑니다. 역시 좋습니다.
이제 광거당입니다. 키작은 굴뚝이 줄지어 행랑 담에 붙어 있는 모습이 귀엽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꽃담 하나가 떡 하니 가로막고 서 있습니다.
정원 풍경과 바로 마주치지 않게 경치를 숨기는 `장경' 기법이네요.
양쪽으로 사~알짝 집안 모습이 조금 보입니다.
당연히 눈길은 저 담장벽에 기왓장으로 만든 꽃에 꽂힙니다.
툭툭 꽂아넣어 소박하게 만든 꽃 한송이. 꽃을 여러 송이 만들었다면 오히려 꽃의 존재감이 적었을 겁니다. 단 한송이만으로 시선을 끌어모으는 저 감각. 쉬워보여도 쉽지 않은 전통 디자인의 묘미가 아닐까 합니다.
꽃담 왼쪽으론 장독대입니다. 여기서도 우리 전통 벽의 기능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가로막기 보다는 공간에 변화를 주고, 또는 저렇게 장독대나 다른 시설을 만들기 위한 지지대 역할도 합니다.
꽃담 왼쪽으론 장독대입니다. 여기서도 우리 전통 벽의 기능을 잘 볼 수 있습니다. 가로막기 보다는 공간에 변화를 주고, 또는 저렇게 장독대나 다른 시설을 만들기 위한 지지대 역할도 합니다.
저 장독대는 그냥 담장을 배경으로 하지 않고 다시 기와로 키작은 둘레담을 쳤습니다. 평범한 기와로 저렇게 온갖 다양한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우리 전통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이제 광거당입니다. 사진으로는 역시 티가 안나지만 상당히 큰 건물입니다. 마을 맨 가장자리에 호젓하게 자리잡아 넓은 마당을 굽어보는 주인장의 풍모가 절로 흘러나옵니다.
건물 오른쪽 누마루 편액이 아주 강렬합니다. 추사의 글씨로 새긴 현판인데, `壽石老苔池館', `수석과 묵은 이끼와 연못이 있는 집'이란 뜻입니다.
건물 오른쪽 누마루 편액이 아주 강렬합니다. 추사의 글씨로 새긴 현판인데, `壽石老苔池館', `수석과 묵은 이끼와 연못이 있는 집'이란 뜻입니다.
건물 안은 크게 다를 것이 없겠죠. 그런데 이 작은 부분 하나가 재미있습니다.
기둥에 덧댄 작은 선반입니다. 인테리어란 참 다양한 아이디어가 만들어내는 예술이라 하겠습니다.
기둥에 덧댄 작은 선반입니다. 인테리어란 참 다양한 아이디어가 만들어내는 예술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마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저 수봉정사와 광거당보다도 마을 입구에 있는 이 건물이었습니다.
마치 창고처럼 보이는 저 건물은 `인수문고'란 곳입니다. 저렇게 건물에 빛이 들어오는 부분이 없고 벽만으로 이뤄진 건물은 한옥에선 거의 대부분 서고입니다. 저 인수문고도 서고입니다. 이곳 문씨 문중의 도서관이자 책창고인 것입니다.
이 작은 씨족마을에서 이렇게 자체 도서관과 문고를 지니고 있다는 것, 그게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인수문고는 소장하는 책들의 수준도 높기로 유명합니다.
문씨세거지가 폼이 나는 이유는, 멋지고 근사한 잘 지은 집들이 많아서가 아니라 이렇게 한 집안 전용 도서관을 만들었다는 점일 겁니다. 집이 부자가 아니라 책이 부자인 마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저 인수문고 옛건물만으로 모자라 새로 지은 건물 두 채가 바로 옆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 만든 모양새가 좀 거시기하죠?
아무래도 콘크리트로 만든 건물이다보니 나무로 지은 건물에 품격과 느낌이 견줄 바가 못됩니다. 그래도 저 정도 정성을 다른 곳에선 보기 힘들겠죠.
한 30~40년 전까지만해도 전국 곳곳에 이렇게 잘 꾸민 전통가옥 밀집 마을들이 많았습니다. 불과 한 세대만인 지금 이 정도 마을은 이제 아주 드물어지고 말았습니다. 저 문씨마을이 그리 대단할 것이 없더라도 이렇게 남아 존재하는 것, 그리고 전통가옥에서 후손들이 옛 문화를 지키고 살아가는 것은 그래서 의미있고 소중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째 만든 모양새가 좀 거시기하죠?
아무래도 콘크리트로 만든 건물이다보니 나무로 지은 건물에 품격과 느낌이 견줄 바가 못됩니다. 그래도 저 정도 정성을 다른 곳에선 보기 힘들겠죠.
한 30~40년 전까지만해도 전국 곳곳에 이렇게 잘 꾸민 전통가옥 밀집 마을들이 많았습니다. 불과 한 세대만인 지금 이 정도 마을은 이제 아주 드물어지고 말았습니다. 저 문씨마을이 그리 대단할 것이 없더라도 이렇게 남아 존재하는 것, 그리고 전통가옥에서 후손들이 옛 문화를 지키고 살아가는 것은 그래서 의미있고 소중하다 하겠습니다.
마을을 돌아보고 다시 입구로 나오는 길, 재미있는 힌트 하나가 밭 속에 숨어 있습니다.
저 키작은 돌탑입니다.
밭 한가운데 왠 돌탑일까요?
우리나라에서 돌탑이 있는 곳은 당연히 절 뿐입니다. 이 인흥마을도 원래 절터였습니다.
13세기 인흥사란 절이 있던 곳이었고, 마을 이름도 이 절에서 나왔습니다. 절은 언제인가 없어졌고, 지금은 저 작은 탑 하나만 오도카니 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