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5일 일요일
화가 장욱진의 삶과 죽음
장욱진 그림이 갖는 의미는 평자들이 따질 일이다. 나 같은 애호가가 보기엔 자유분방이 특징인 조선시대 민화의 특질을 서양화 기법으로 수용, 그걸 확고부동한 한국사람의 그림 곧 한국화의 경지로 올린 점 그리고 철저한 작가적 자유를 고집하는 생활 방식이 이중섭의 경우처럼 ‘신화’가 되고 그게 일반인들의 서양화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자극했다는 점이겠다. 아름다움은 착함과 통한다는 우리의 전통대로 그는 줄곧 이상향을 찾는 도인의 한일한 경지를 화폭에 담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면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 한송이 꺾어 들고 멀거니 남산을 바라본다”는 도연명의 시가 연상된다.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삶 내가 처음 만났을 때는 그의 나이 ‘일곱살’ 때였다. 나이는 먹는 게 아니라 뱉어야 한다면서 쉰일곱 나이를 그렇게 말했다. 나이를 뱉어버림으로써 아이들이 갖는 순수에로의 희귀가 한평생 그가 추구한 지향이었다. 그가 일관되게 주장한 말이 있다. “나는 심플하다”였다. 장욱진 그림의 매력은 단순함에 있다. 단순은 그림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러니 아이들도 좋아하고 그림감상의 연조가 깊은 어른들도 애호한다. 그만큼 보편성을 얻었던 것이다.
단순으로 일관하자면 세속의 갖가지 체면과 부담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거기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는 그럴 만한 용기를 가졌다. 사회지위를 통해 자신의 그릇을 확인하는 것이 보통사람의 질서인데 장욱진은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자리를 몇년만에 걷어치운 뒤 자연이 넉넉한 시골로 떠돌았다. 덕소의 시멘트 상자집에서 사고무친한 사람처럼 홀로 끼니를 꾸려가면서 12년을 보냈다. 다시 서울을 훌쩍 떠나 수안보의 담배 농사집 토방에다 화실을 차렸다. 아내와 함께였다는 점을 빼고는 궁벽하기가 덕소와 다름 없었다. 수돗물이 부족했던 수안보 6년은 도시 달동네의 삶 그대로였다.
그가 그림으로 생활을 꾸릴 수 있게 된 것은 지난 10년에 불과했다. 거의 한평생 그림에 대한 사회의 인식과 성원이 없었던 시절을 살았다는 뜻이다. 가정경제는 아내가 도맡았고 그는 그림만 고집했다. 옛말에 “남자가 처자와 집에 매인 것이 감옥보다 심하다. 감옥은 풀려날 기미가 있지만 처자는 잠시도 마음을 멀리할 수 없구나”했다. 그럼에도 보통사람들과 달리 가정생활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를 누렸던 ‘무모한’ 용기의 사람이었기에 세상은 그를 기인이라 부른다.
평생 붓을 놓지 않았던 자유인 평생에 그가 지녔던 자부심은 온갖 궁벽 속에서도 “한번도 붓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자부심만큼이나 자책감을 갖고 있었다. “나는 한평생 그림 그린 죄 밖에 없다”고 했다. 죄의식이 잠재할 만도 했을 것이다. 오늘날과는 달리 그가 그림을 시작했던 시절만 해고 화가의 길은 천형의 길이었다. “미술은 취미도 열정도 아니다. 그건 삶의 전부였다”라던 어느 유명 서구화가의 술회는 바로 장욱진의 경우였다. 그러기에 진작 장욱진의 그림을 평가했던 전 국립박물관장 김원룡 교수는 그의 사람됨을 일컬어 “붓만 빼앗으면 그 자리에 앉은 채 빳빳하게 굶어죽을 사람”이라 했다.
생활 부담으로부터의 자유에 어찌 보통사람다운 고뇌가 없었겠는가. 술의 탐닉도 따져보면 그런 고뇌의 한 표출이었을 것이다. 화가의 가난이 더욱 음주벽을 자극하기도 했다. 배가 고파도 밥 사달라는 것은 어딘지 궁색해서 자꾸 술만 얻어먹게 됐다는 것이다. 책임을 회피하는 자유는 무의미하다. 그의 지독한 주량에도 불구하고 장욱진이 붓을 들어 그림에 몰입하면 술은 몇 달이고 한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곤궁으로부터 자유를 보장한 따뜻한 가정이 있었다는 점에서 장욱진은 행운아였다. 그러나 다시는 그런 자유인을 감쌀 가정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철저한 자유인이 없다면 예술은 얼마나 건조할 것인가. 서구에서는 예술가의 자유정신을 보장해줄 수 있는 사회제도를 여럿 마련하고 있지만 이 점에서 우린 아직 요원하다.
일을 하기 위해 몸뚱아리는 소모해야 한다고 말하던 장욱진. 5백점 가까운 유화작품을 남기고 일흔네살로 한평생을 마감했다. 그의 방식대로 말한다면 더욱 아이의 경지에 가까이 간 ‘네살’의 나이로 한줌의 재로 돌아갔다. 무로 돌아간 게 아니라 절대자유를 찾아나선 길이었겠다.
시사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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