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5일 일요일

장욱진(張旭鎭) 폐허 속에서 다시 날아오르다




폐허 속에서 다시 날아오르다



 
부인 이순경 여사와 함께 한 화가. 장욱진
  

화가는 항상 이렇게 쪼그리고 앉은 자세로 작업을 했다.

  
동경 유학생 출신의 모던 보이었지만 동양 정신에 충만한 작품 세계를 남긴 장욱진. 그는 인생은 소모하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장욱진 연보
1918년 충남 연기군 동면 송룡리 105번지에서 아버지 결성 장씨 기용(基鏞)과 어머니 이기재(李基在)의 차남으로 출생하다.(음력 1917년 11월 26일)
1922년 (5세) 일가가 서울 당주동 한옥으로 이사
1923년 (6세) 부친 별세, 고모 옆집(내수동)으로 이사
1924년 (7세)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현서울사대부초)입학하다. 공부보다 그림에 더 열중하여 다섯 살 위인 형에게 꾸지람을 자주 듣다. 까치를 많이 그리다.
1926년 (9세) 보통학교 3학년생인 그의 그림을 새로 부임한 미술교사가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주최의 <전일본 소학교미전>에 출품, 일등상을 받다. 처음으로 유화를 시작하다. 이후 미쓰코시 백화점 주최.
1930년 (13세)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입학하다.
1932 (15세) 일본인 교사의 공정치 못한 처사에 격렬히 항의한데 대한 징계로 경성 제2고보를 중퇴.
1933년 (16세) 중퇴 이후 집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성홍열을 앓아 충남 예산 수덕사(만공선사 선실)에서 6개월간 정양. 때마침 수덕사를 찾아왔던 화가 나혜석을 만나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하다.
1936년 (19세) 체육특기생으로 양정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 육상(높이뛰기)과 빙상선수로 활약.
1937년 (20세) 동아일보주최<학생미전>에서 가작상을 두 차례 수상.
1938년 (21세) 조선일보 주최<제2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공기놀이》를 출품하여 특선과 사장상을 수상하고 상금으로 100원을 받다. 이를 계기로 가족들은 그가 그림그리는 것을 반대하지 않게 되다.
1939년 (22세)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23회)하다. 4월, 일본 동경의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학교)서양화과에 입학.
1940년 (23세)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 《소녀》로 입선.
1941년 (24세) 4월 12일, 이병도박사의 장녀 이순경과 결혼.
1942년 (25세) 장남 정순 출생.
1943년 (26세) 9월, 일본제국미술학교 졸업. <선전>에《언덕》이 입선.
1944년 (27세)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경기도 평택 비행장 건설작업에 동원. 이후 일본 관동군 해군본부(서울 회현동)의 경리요원으로 배속.
1945년 (28세) 장녀 경수 출생. 해방 후 국립박물관(진열과)에 취직하여 도안과 제도일. 박물관 내 관사에 거주.
1947년 (30세) 차녀 희순 출생. 국립박물관 사직. 덕수상업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 김환기,유영국,이규상 등과 '신사실파'결성.
1948년 (31세) 12월, 동인전<제1회신사실파전>(화신백화점)에 출품.
1949년 (32세) 11월,<제2회신사실파전>(동화백화점)에 《독》,《조춘》, 《面》,《마을,》《까치》,《몽》,《방》,《원두막》,《점경》,《수하》,《아이》등 유화 13점 출품.
1950년 (33세) 6.25발발 후 바로 피난가지 못하고 가족이 먼저 부산으로 피난.
1951년 (34세) 1월 초 부산으로 피난. 여름에 종군화가단(중동부전선 제8사단)에서 그림을 그리고, 종군작가상 수상.
1952년 (35세) 제4회 종군화가단전<3.1절 기념 종군화가미술전>(부산 대도회 다방)에 출품.
1953년 (36세) 피난지 부산에서 어린이 동화책의 컷을 많이 그리다.《자동차 있는 풍경》을 제작. 5월 말<제3회 신사실파전.
1954년 (37세) 3월, <제6회 종군화가전>(부산국제구락부>에 출품. 7월, 대한미협전<한국현대회화 특별전>에 출품.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대우 교수 취임. 동료 미대교수 노수현과 친분. 4녀 윤미 출생.
1955년 (38세) 「문학예술」지에 "발상과 방법"기고.
1957년 (40세) <동양미술전>(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출품.
1958년 (41세) 11월 20일, 동경제국미술학교 동문전인 <백우회 제1회전>(국립박물관 화랑)에《樹下》를 출품. <한국현대작가전>(미국샌프란시스코)에 출품.
1960년 (43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직 사임. 명륜동(2가 22-2)개천가의 초가집을 양옥으로 개조.
1961년 (44세)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 출신의 동문화가들인 권옥연, 유영국, 이대원, 김창억, 임완규 등과 '2·9동인회' 조직, 그<제1회 2·9동인전>(국립도서관 화랑)에 《산수》등 유화 2점 출품.
1963년 (46세) "덕소시절"(1963-75).
1964년 (47세) 차남 홍순 출생하다. 제1회 개인전(반도화랑, 11월 2일-8일)을 개최.
1967년 (50세) <제5회 앙가주망전>에 출품하는 등 서울대 제자들과 그룹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시도와 실험에 자극을 받음.
1968년 (51세) <제6회 앙가주망전>(신세계백화점 화랑)에 출품.
1969년 (52세) 3월부터 6월까지 동아일보의 「書舍餘話」란에 수필 발표. ("표현", "죄가 있다면", "발산", "저항", "나의 주변")
1970년 (53세) 정초에 명륜동집에 머물던 중 아내가 불경공부를 하는 모습에 착상, 덕소로 돌아온 후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면서 아내의 초상화《진진묘》. 이 그림을 그린 뒤, 명륜동에 돌아와 3개월간 앓아 눕다.
1972년 (55세) <한국근대미술 60년전>(국립현대미술관 주최)에 《모기장》등 4점 출품.
1973년 (56세) <한국현역화가 100인전><국립현대미술관 주최)과 <제11회 앙가주망전>(신세계백화점 화랑)에 출품.
1974년 (57세) 제1회 개인전 이후 십년 만에 제2회 개인전(공간화랑, 4월12일-18일)을 열고, 근작 중심의 유화 32점 출품.
1975년 (58세) 5월, 덕소생활을 청산 "명륜동시절"(1975-79)시작.
1976년 (59세) 불교인 백성욱 박사와 함께 시골의 사찰을 많이 찾아다녔고, 그 영향으로 《팔상도》와 《사찰》등의 작품을 제작. 잡지, 신문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산문집『강가의 아틀리에』(민음사)를 발간.
1977년 (60세) 양산 통도사에서 경봉스님(1892-1982)을 만나 법명 비공(非空)을 얻다.
1979년 (62세) 차남 홍순 사망. <화집발간 기념전시회>(현대화랑, 10월11일-17일)에 유화25점, 판화 13점, 먹그림 18점 출품.
1980년 (63세) 봄, 수안보의 농가를 고쳐 화실로 사용, "수안보시절" (1980-1985)시작.
1981년 (64세) 개인전 직전에 한양대학교 부속병원에서 백내장 수술. <장욱진 개인전>(공간화랑, 10월 11일-17일)에 유화 20여점, 에칭판화 5점 출품. <앙가주망 20년>1,2부에 출품.
1982년 (65세) 7월 중순, 부인과 함께 여류화가들의 미국여행에 동행. 이때 가지고 간 유화, 실크스크린, 에칭판화, 먹그림으로 재미화가 김봉태의 갤러리스코프(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장욱진전>개최.
1983년 (66세) 3-4월, 부인과 함께 처음으로 유럽여행(스페인,영국,이태리,프랑스). 근작 석판화 4점과 함께 판화집 출간기념<장욱진 판화전>(연화랑, 10월 22일-29일)개최.
1985년 (68세) 엔티크 컬러 사용을 중지하다. 수안보 화실 정리하고 서울로 이주. <한국 양화70년전>(호암갤러리)에 출품. 기관지염으로 술과 담배를 끊다.
1986년 (69세) 겨울동안(1월 중순-2월 말)부산 해운대에서 제작한 유화 8점과 먹그림, 소묘 등으로 개인전<장욱진 작품전>(국제화랑, 6월 12일-19일)개최.
1987년 (70세) 2월, 대만과 태국을 여행. 화집발간 기념 개인전<장욱진전>(두손갤러리, 5월 28일-6월 6일)개최하다. 유화 80여점 출품.
1988년 (71세) 1월에 딸, 며느리와 인도로 여행, 뉴델리 박물관에서 깊은 감명. 12월, 발리섬으로 여행.
1989년 (72세) 7월, 경기도 신갈의 한옥 옆에 양옥을 짓고 입주. 가을, <한국현대화전>(미국 뉴저지주 버겐 예술·과학박물관)에 유화8점 출품. <1900년대 한국미술대표작가전>(국립현대미술관)에 출품.
1990년 (73세) 가을, 고향의 생가 방문. 미국 '한정판 출판사'The Limited Editions Club)선정 수제작(水制作) 한국관련 도서의 그림을 맡기로 위촉. 12월 27일 점심식사 후 갑자기 발병, 오후 4시 한국병원에서 타계. 12월 29일 영결식(오후 1시 수원 시립장제장).
1991년 3월, 후학들이 유골을 모신 기념비 건립(충남 연기군 동면 응암리 선영).
 
『장욱진: 모더니스트 민화장』 - 열화당미술문고 211/ 김형국 지음 / 열화당 / 1997년 - "나는 화가 장욱진이란 사람, 그리고 그의 그림을 사랑한다. 이 글은 바로 그 체험적 사랑을 적고 있다. 그림에 관해 학문적 교육을 받은 적 없는 사람이 이 글을 적는 것은 사랑이 글로 적을 만한 대상이고, 그 사랑이 체험을 글로 옮겨야 한다는 용기를 줄 만큼 높기 때문이다." 가격이나 판형 모두 가장 적당한 책이다. 장욱진에 대해서 알고 싶은 이들에게 대중적으로 가장 추천할 만한 책이다. 도판의 상태나 사진, 해설 모두 좋은 편이다. 나는 장욱진에게 있어 동생 테오 역할을 김형국 선생이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사람 장욱진』/ 김형국 지음 / 김영사 / 1993년 - 장욱진의 제자들을 비롯해서 그의 지인들이 모여 그야마로 그 사람 장욱진을 논한 책이다. 현재는 절판되었다고 하는데 소설가 강석경을 비롯해 쟁쟁한 여러 인물들이 자신이 만나본 장욱진의 여러 면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장욱진의 색깔있는 종이그림』/ 김형국 엮음 / 열화당 / 1999년 - 이 책에는 다른 책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장욱진의 매직 그림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재미있는 것은 장욱진의 부인인 이순경 여사의 회고가 담긴 뒷 부분이다.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장욱진에게 시집와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동안의 삶과 애환이 잘 녹아 있다. 애써 고상이나 교양을 가장하지 않아도 예술가의 아내는 고상하다.
『장욱진 카탈로그 레조네 - 양장본』/ 정영목 지음 / 학고재 / 2001년 - '레조네(raisonne)'라는 것은 어느 작가의 '전작도록'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그리 흔한 개념이 아니었다. 외국에서는 진품인가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도 철저하게 제작되는데 반해서 그동안 우리 미술계는 너무 영세한 탓도 있었겠지만 주먹구구식의 작품 관리로 레조네는 엄두도 못내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해 나온 장욱진의 레조네는 매우 의미있다. 게다가 그림 하나하나마다 제법 충실한 해설이 덧붙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상당한 금전적 출혈이 있어야만 소장할 수 있는 책이다.
『강가의 아틀리에 - 장욱진 그림산문집』/ 장욱진 지음 / 민음사 / 1999년 - 장욱진 스스로가 쓴 글과 먹그림들이 녹아 있는 매우 고졸한 맛이 있는 산문집이다. 동심의 천진난만한 모습인 듯하면서도 치열한 예술혼으로 세상과 대결했던 화가로서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쟁을 겪으면서 장욱진은 폭주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나는 내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버려야겠다. 남는 시간은 술로 휴식하면서." 장욱진에게 술은 고통을 외면하는 방법이거나 잊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 온몸을 던져 그림을 그리다 잠깐 동안의 휴식을 위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화가 장욱진이 매일 술만 마시고 살았던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장욱진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엔 술을 일절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엔 몇 달 동안 혹은 몇 년간 일절 술을 마시지 않고(때로는 식음을 전폐한 채로) 그림만 그렸다.
  그의 피난살이는 그의 자화상인 <보리밭>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가족을 찾아 텅빈 길을 걸어간다. 그가 걸어가는 길은 화면을 좌우로 나누고 구획짓듯 나뉘어 있고, 피난길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의 한 사내가 걸어간다. 그러나 길은 붉다. 장욱진이 피난에서 돌아와 집을 찾으니 살던 집은 죄다 부서지고, 화가의 그림들은 모두 불타 없어져 버렸다. 전쟁통에 오랫동안 모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기 때문에 장욱진과 부인은 가족들이 모두 함께 살도록 하기 위해 매우 열심히 일해야 했다. 화가는 잡지에 삽화를 그렸고, 부인은 조그만 책방을 차려 살림을 꾸려나간다. 전쟁을 통해 화가 장욱진에게 집이란 각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 되었다. 장욱진은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에도 장욱진은 화백이나 교수보다는 집 가(家)자가 붙은 화가로 불리기를 항상 희망했다. 그에게 그림은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었고 집은 그의 마음에 들어앉은 하나의 완성체였는지 모른다.
  화가와 가족들은 어려운 살림이기는 했지만 한데 모여 살게 되었고, 장욱진은 매우 행복해 했다. 이때부터 그는 가족의 모습을 작은 화폭에 옮겨놓기를 즐겨했다. 이 무렵 그린 작품 중 유명한 것이 <가족도>이다. 가족이 한 집에 모여 옹기종기 둘러 앉은 모습이 그에게는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광경이었다. 물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교수라는 신분과 직업의 안정에서 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화가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미술이란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의 제자들은 그를 믿고 몹시 따랐지만 장욱진은 가르치는 것보다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했고,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친다는 그 자신의 감정이 오래도록 그 자리에 안주할 수 없도록 했다. 그는 타고난 화가였던 것이다. 이 무렵 장욱진의 동료화가 중 한 사람이었던 화가 이중섭이 굶주림과 외로움 속에서 병들어 먼저 세상을 떠난다. 장욱진은 그로부터 몇 년 뒤 교수직을 사임하고 만다. 때마침 4.19혁명을 앞둔 무렵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들이 자주 시위를 했는데, 제자들이 매일같이 장욱진 곁에 모여들자 학교 당국은 그가 시위를 부추긴 것으로 추측했는데, 학교에서 불편해 한 탓보다는 그 자신이 떠나고 싶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가족, 캔버스에 유채,17.5×20.0㎝, 1973 - 장욱진의 그림에 등장하는 주요 주제들이 거의 다 등장한 그림이다. 네 마리의 새, 집과 나무, 길과 가족. 뒤의 붉은 해와 산은 어찌보면 십장생도 같기도 하다.
강가의 아뜰리에
  청해서 교수직을 사임한 장욱진은 몇 년 뒤 자신의 화실을 덕소에 꾸리게 된다. 지금은 옛날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사할 무렵만 하더라도 덕소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이었다. 화가의 작업실인 아뜰리에에 이르는 동안 사람이 사는 집이라곤 면장집 하나뿐인 시골,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그저 자연을 벗삼아 살아야 하는 오지에서 장욱진은 혼자 살았다. 화가는 훗날 회상하며 말하길 "나는 천성적으로 서울이 싫다. 서울로 표상되는 문명이 싫은 것이다."라고 한다. 하지만 장욱진은 사람들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낭떠러지 같은 한강가 언덕에 집을 짓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이곳 덕소의 비와 달, 바람 그리고 덕소의 모든 것을 얘기해길 즐겨했다.
  그는 스스로 입버릇처럼 늘 "나는 심플하다. 때문에 겸손보다는 교만이 좋고 격식보다는 소탈이 좋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거짓으로 겸손한 척 하기보다는 정직한 교만 쪽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그의 평소 생각이기도 했다. 장욱진은 거짓을 미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스페인의 유명한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세계와 화풍의 변모를 가리켜 사람들은 청색 시대니 장밋빛 시대니 하고 구분하듯이, 나무가 사시사철 늘 한결 같은 모습으로 있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변모해가듯이 화가 장욱진의 작품 세계도 여러 차례 변해갔다. 그런데 장욱진의 변화가 다른 화가들과 좀 특이한 것은 사는 집이 달라질 때마다 그 세계가 조금씩 변해갔다는 것이다.
  앞서 장욱진에게 있어 집이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했지만, 그에게 집이란 사랑하는 가족들이 모여 사는 곳이자, 사람의 영혼이 깃드는 곳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살 집에 대해서 끊임없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화가에게는 자신이 살 집을 짓는 일도 곧 예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욱진은 집을 짓는 동안엔 그림을 그리지 않을 만큼 집에 대해 애정을 보였다(그에게는 집도 작품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거나 보존상태가 매우 나쁜 형국이다). 화가 장욱진은 덕소에서, 서울 명륜동으로, 다시 수안보로, 용인으로 이사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화가는 덕소의 풍경 속에서 자신의 그림이 어떤 세계를 만들 것인가 고민했다. 화가는 동경 유학 시절, 서양화풍을 모방하는 일본 화풍을 따르지 않았고, 외국의 미술을 직접 살펴보면서 자신의 세계, 자신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리려고 했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전기도 수도도 없는 덕소에 갔지만, 덕소에서 그는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이무렵 우리 화단의 유행이었던 모더니즘과 비교해서 자신의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먼저 스스로 납득할 수 있기 전에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여름의 강가에서 부서진 햇빛의 파편들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수면 위에 떠도는 아지랑이를 타고 동화가 들려올 것 같다. 물장구를 치며 나체로 뛰노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에서 적나라한 자연을 본다. 그리고 천진했던 어린 시절에의 향수가 감미롭고 서글프게 전신을 휘감는 것을 느낀다. 태양과 강과 태고의 열기를 뿜는 자갈밭, 대기를 치스치는 여름 강바람- 이런 것들이 나 역시 손색없는 자연의 아들로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이럴 때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공허하지 않다. 자연의 침묵이 풍요한 내적 대화를 가능케 한다.
   그럴때 나는 물이 주는 푸른 영상에 실려 막걸리를 사랑해 본다. 취한다는 것, 그것은 의식의 마비를 위한 도피가 아니라 모든 것을 근본에서 사랑한다는 것이다. 악의 없이 노출되는 인간의 본성을 순수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이기적인 내적 갈등과 감정의 긴장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경에 찬 아름다움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 가로 놓인 우울한 함정에서 절망 대신에 긍정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절실한 정신의 휴식인 것이다.
   그렇다, 취하여 걷는 나의 인생의 긴 여로는 결코 삭막하지 않다. 그 길은 험하고 가시덤불에 쌓여 있지만 대기의 들장미의 향기가 충만하다. 새벽 이슬을 들이마시며 피어나는 들장미를 꺾어들고 가시덤불이 우거진 인생의 벌판을 방황하는 자유는 얼마나 아프고도 감미로운가! 의식의 밑바닥에 잔잔히 깔려 있는 허무의 서글픈 반주에 맞춰 나는 생의 환희를 노래한다.
   나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자기를 한곳에 몰아 세워 감각을 다스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아무 것도 욕망과 불신과 배타적 감정 등을 대수롭지 않게 하며, 괴로움의 눈물을 달콤하게 해주는 마력을 간직한 것이다. 회색빛 저녁이 강가에 번진다. 뒷산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강바람이 나의 전신을 시원하게 씻어 준다. 석양의 정적이 저멀리 산기슭을 타고 내려와 수면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저멀리 노을이 머지않아 달이 뜰 것이다. 나는 이런 시간의 쓸쓸함을 적막한 자연과 누릴 수 있게 마련해 준 미지의 배려에 감사한다. 내일은 마음을 모아 그림을 그려야겠다.
   무엇인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 강가의 아뜰리에 전문, <1965. 8. 현대문학>  
그림을 통한 구도자와 동반자 진진묘
  욱진은 덕소가 예전의 풍경을 잃게 되자 결국 정들었던 강가의 아뜰리에를 떠나 다시 서울 명륜동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도시를 좋아하지 않았던 화가는 틈만 나면 시골의 자연을 찾아 여행을 다녔다. 장욱진은 산 속의 사찰과 자연 속에서 마음의 평안함을 구했다.  화가의 부인 이순경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남편과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부부 사이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장욱진은 부인 이순경에게 옛날 만공선사가 자신에게 해준 말을 들려주곤 했다고 하는데 "머리를 깍여 불자를 만들고 싶다. 하지만 네가 하는 공부나 우리가 하는 공부나 모두 같은 길이니라. 마누라를 잘 얻으면 재미있게 살겠다." 고 말이다. 장욱진은 자신의 작품을 팔지 않는 걸 원칙으로 했던 사람이었다. 늘 그리기만 하고, 전시회를 열어도 작품을 팔기보다는 정말 그림을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이 거저 달라고 하면 그냥 집어주길 좋아했다.
  화가로 생활해 나가기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였기에 아내에 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던 장욱진은 "마누라를 잘 얻으면 재미있게 살겠다"던 만공선사의 말을 아내에게 들려주어 미안함을 전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장욱진은 불기 하나 없는 한 겨울의 덕소 화실에서 일주일간 밥을 굶어가며 아내 이순경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그림이 아내의 법명을 따서 제목을 정한 <진진묘(眞眞妙)>였다. 그림을 완성하고 화가는 3개월간 앓아 누웠다고 한다.
  장욱진이 평생을 두고 즐겨 그린 주제 중 하나는 가족이었다. 슬하에 2남 4녀의 아이들을 두었는데, "예술 작품은 인간의 생명처럼 무한한 고독"이라고 말했던 그에게 가족은 더할 나위 없는 방패였고, 버팀목이었다. 아내가 그러했고, 그의 자녀들이 그랬다. 장욱진의 가족은 화목했고 행복했다. 그러나 나이 오십이 다 될 무렵 얻은 막내 아들은 화가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만들었다. 뒤늦게 얻은 맏둥이 자식인지라 애지중지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석달이 지날 무렵 아이가 정신지체아임을 알게 된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둥이 자식이 병을 앓기 시작하자 화가는 사찰을 찾아다니며 더욱 불교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어느날 여름 통도사를 찾았다가 불력이 높은 것으로 이름난 경봉 스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의 일이다. 경봉이 대뜸 화가에게 "뭘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장욱진은 "까치를 잘 그리는 사람"이라 답한다. 그러자 스님은 "입산을 했더라면 진짜 도꾼이 됐을 것인데"라 하자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도 같은 길"이라 답한다. 그 대답을 듣자 스님은 "쾌(快)하다"라며 그에게 "비공(非空)"이라는 법명을 준다. 그리고 장욱진에게 선시 한 수를 적어 주었다. "장비공거사. 까악까악. 나도 없고 남도 없으면 모든 진리를 자유롭게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이며,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닌 데서 부처의 모습을 본다"는 내용의 한시(漢詩)였다.
마음의 눈을 얻은 화가
  들이 병을 앓을 무렵 화가는 연이어서 가족과 아이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병으로 고통받는 자식을 위한 그의 노력이었다. 화가 부부는 아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15살 되던 1979년 결국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 즈음 안국동 거리에서 미술사학자 김철순이 화가 내외를 만났다. 어딜 가느냐는 물음에 화가는 아무런 내색없이 태연자약하게 죽은 아이 사망 신고하러 간다고 말하더라고 회상하며, 하도 태연하게 말하길래, 역시 달관한 사람은 자식의 죽음도 저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구나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중에 가서야 그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화가 역시 자식의 죽음을 몹시 가슴 아파했던 것이다. 장욱진은 자신이 죽기 직전에야 자신이 죽으면 아들을 화장해 뿌린 곳에 함께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승에서 못다한 부자간의 정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잃은 장욱진에게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왔다. 화가에게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눈에 백내장이란 병이 생기면서 점점 시력을 약화되어 갔던 것이다. 마치 베토벤이 난청으로 결국 귀가 멀었던 것처럼 화가는 눈에 백내장이 생기면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전시회를 앞둔 장욱진은 자신이 제대로 점을 찍고, 바르게 선을 그었는지에 대해 염려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력이 약화되는 와중에 그린 그의 작품들은 화가의 염려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수 십 년을 그림만 그려왔던 그의 손은 시력의 장애를 극복했던 것이다. 화가는 몸의 눈이 아니라 늘 마음의 눈으로 사람과 사물을 보아왔다. 그는 마음의 눈으로 그리는 화가였다.
새처럼 살다 훌훌 떠나간 화가
  안보에서 용인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화가는 늘 변함없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화가는 마치 다 자란 새가 자리를 털고 둥지를 떠나는 것처럼 훌훌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만다. 화가의 부인 이순경은 남편의 죽음에 대해서 "당신 성질처럼 푸드득, 그렇게 금방 돌아가셨다"고 회고한다. 푸드득, 그렇게 말이다. 화가는 생전에 "난 죽음에 대해 두려운 게 없어요. 오래 사는 게 장한 것은 아니나 생명을 줄일 수는 없는 거고, 기능 없으면 죽어 버리는 게 좋아. 내 기능은 그림 그리는 거니까 죽는 날까지 그려야죠."라고 말해 왔다. 그의 이런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사막을 떠도는 유목민의 세계관과 닮아 있다. 자연 속에서 나고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순환의 한 고리일 뿐 특별히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장욱진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죽기 하루 전에 해묵은 종이 뭉치 속에서 먹그림을 가려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무런 미련없이 태워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유골은 화장해서 앞서 간 자식이 있는 곳에 뿌려달라고 말한다. 원래부터 특별히 정리할 만한 짐이나 세간이 없는 단촐한 그의 방이었는데도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는 늘 깔끔하게 정리해두길 좋아했다. 그런 성정 탓인지 아니면 정말 고승대덕들이 그러했다는 것처럼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탓인지 그는 자신의 그림들과 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훌훌 떠났다. 하지만 장욱진의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생전에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은 차마 그의 유골을 뿌릴 수가 없어서 고향 마을에 탑비를 세우고 그 안에 유골을 모시게 했다. 그 탑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심플한 그림을 찾아 나섰던 구도의 긴 여로 끝에 선생은 마침내 고향땅 송룡 마을에 돌아와 영생처로 삼았다. 천구백구십년 세모의 귀천이니 태어나서 칠십삼년 만이었다. 선생은 타고난 화가였다. 어린 날 까치를 그리자 집안의 반대는 열화같았고 세상은 천형으로 알았지만 그림이 생명이라 믿었던 마음은 드깊어갔다. 일제 땅 무사시노 대학의 양화 공부로 오히려 한국 미술에 빛나는 정수를 깨쳤다. 선생은 타고난 자유인이었다. 가정의 안락이나 서울대학 교수 같은 세속의 명리는 도무지 인연이 없었다. 오로지 아름다움에다 착함을 더한 데에 진실이 있음을 믿고 그것을 찾아 평생 쉼없이 정진했다. 세속으로부터 자유를 누린 대신, 그림에 자연의 넉넉함을 담아 세상을 감쌌고 일상의 따뜻함을 담아 가족 사랑을 실천했다. 맑고 푸근한 인품이 꼭 그림 같았던 선생을 기리는 문하의 뜻을 모아 최종태는 돌을 쪼았고 김형국은 글을 적었다. 천구백구실일년 사월.
동심의 시선으로 발견한 우리의 아름다움
  가 장욱진은 생전에 불교의 세계와 좀더 가까운 사람이긴 했지만 늘 기독교의 진리와 불교의 진리는 다르지 않다는 말을 했다. 예수는 어린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했는데 화가는 늘 어린이의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화가는 늘 나이는 먹는 것이 아니라 뱉아내는 것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일곱 살이라고 말하며 살았다. 그런 화가였기 때문에 장욱진의 그림은 작고 소박한 화폭에 단순한 주제로 이루어진 것들이 많다. 그는 "작은 그림은 친절하고, 치밀하다" 며 어린이의 마음으로 바라볼 때 오히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들을 그렸다. 그는 서양화를 공부했지만 한국화와 서양화의 구분이나 회화와 도자기, 판화의 구분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이 모든 것은 다만 예술과 생활 안에 이미 한 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화가는 평생을 두고 새와 나무와 가족을 그렸다. 우리 미술에서 나무를 즐겨 그린 화가는 장욱진 말고 박수근도 있었다. 박수근이 캔버스에 여러 번 유화물감을 덧칠하는 마티에르 기법이란 것을 사용해 나무를 그린 것과 달리 장욱진은 이미 칠해 논 물감을 다시 긁어내는 방법으로 나무를 그렸다. 하지만 박수근의 나무들이 잎사귀가 모두 떨어진 헐벗은 나무였던 것과 달리 장욱진의 나무들은 풍성한 잎사귀로 넘치는 생명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또다른 화가 이중섭과 장욱진은 모두 가족을 즐겨 그렸다. 두 사람은 모두 가난했지만 이중섭의 아내는 일본인이었고, 그런 탓에 이중섭은 부인과 함께 살 수 없었다. 하지만 장욱진은 가족과 아내의 돌봄 속에서 오랫동안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장욱진은 이중섭보다는 행운아였다.
밤과 노인, 1990, 캔버스에 유채, 41x32cm, 개인소장 - 이 작품은 오랫동안 장욱진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왔지만 사실과 다르다. 1951년에 그려진 작품인 자화상 <보리밭>에서 서양식 모던한 신사 복장을 하고 있던 화가는 그후 40여년이 흐른 뒤 74세가 된 화가는 집과 아이, 까치와 나무를 저 밑으로 한 채 신선처럼 부유한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길을 걷고 있는 듯이 보인다.
  새를 즐겨 그린 화가로는 장욱진 말고도 오윤이 있다. 장욱진의 후배격인 오윤은 판화를 즐겨 하는 화가였다. 오윤의 새도, 장욱진의 새와 비슷한 의미를 담았지만 장욱진의 새는 좀더 밝고 희망적이었다. 장욱진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서 우리가 늘상 보고, 만질 수 있었던 자연과 사람을 풍성한 생명과 밝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그가 보았던 현실일 수도 있고, 그가 염원했던 세상일 수도 있다. 그의 그림을 보고 느끼는 것은 우리들의 열린 마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숲 속 작은 오솔길을 걷다가 만나게 되는 까치를 보면서 저 새 한 마리가 담고 있는 우리 네 삶의 가치와 존엄한 생명과 자연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장욱진은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주러 온 메신저였을 지도 모른다. 자연과 인간, 하늘과 인간, 세상과 나라는 존재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로서 말이다. 


Fine Art

세속도시에서 신선으로 살다 간 화가. 장욱진



세속도시에서 신선으로 살다 간 화가. 장욱진



만공 선사
나혜석
김은호
김환기
앙투완느 부르델
이중섭
오윤
권진규
마르크 샤갈
하비 콕스
   끔 동양의 '신선(神仙)'이란 개념을 서양에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상상해본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좀더 다양한 의미와 진폭을 가진 개념일 '사부'나 '스승'이 그들에게는 'My Master' 정도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면 분명 '신선'의 개념은 애니미즘의 일종이나 샤머니즘의 한 부류, 도가(道家)적인 느낌의 말 이외에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들(한국인으로 교육받지 않은 이들)에게 우리의 '신선'이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일 것이다. 여기서 '신선'이란 '조선의 호랑이'와 마찬가지로 마을 뒷산에서 어슬렁어슬렁 기어나와 툇마루 한켠에서 곶감 이야기에 놀라 달아나는 친숙하고 어리숙한 대상이자 동시에 산을 수호하는 신령스러운 짐승인 것처럼 매우 다면적인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와 마찬가지로 화가 장욱진을 설명한다거나 설명하려는 시도가 매우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장욱진은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화가들과 비교하자면 행복한 화가였다. 시대는 그에게 좀더 긴 삶을 허락했다. 장욱진에게는 이중섭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아내가 있었고, 박수근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살아 생전의 명예가 있었고, 김환기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고국에서의 삶이, 추상도, 구상도 아닌 동양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탐구가 있었다. 장욱진은 생전에 아내와 가족은 물론 그를 사랑하는 제자, 친구, 수많은 지인들이 곁에 있었다. 그 점만 놓고 보자면 그는 우리의 시대적 한계와 주변의 무시 속에 숨쉴 공간을 얻지 못하고 사라져 간 조각가. 권진규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평안함이 있다.
  '세속도시(The Secular City)'라는 개념은 미국의 신학자이자 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에 의한 것이다. 그는 현대 사회에 이르러 기독교가 신학적, 교회적 편견(이를테면 세상을 성聖과 속俗의 이분법으로 단정하고, 교회와 신학을 성서와 교회 내의 문제만을 다루도록 하는 태도 등)에 젖어 보수화되어 버린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그 대안 개념의 하나로 '교회의 세속화'를 부르짖은 인물이다(나중에 차차 다루겠지만). 1960년대 중반에 등장한 콕스의 이런 주장은 '해방신학'에도 영향을 준다. 장욱진이 태어나 살아갔던 시대는 소위 '근대화'라는 이름 아래 우리 민족이 5,000년 역사를 일구며 살아왔던 이 땅에서 호랑이의 씨가 마르고, 까치가 동네 어귀의 나무에서 기쁜 소식을 알리는 메신저의 위치에서 쫓겨나 아파트 인근 공원의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시기였다. 콕스에게 있어 '세속도시'란 신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이 다시 신에게 다가설 수 있는 공간으로 다시 성립하는 '인간의 도시'란 점에서 긍정적이었지만 장욱진이 살아야 했던 시대는 까치 한 마리로 신의 세계, 인간의 영과 혼이 자연과 교감하며 살아갈 수 있었던 시대로부터 점점 멀어져 가는 세속도시화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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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樹下), 1954, 캔버스에 유채, 33x24.7cm, 개인소장 - 장욱진은 평생을 두고 새와 나무, 가족을 즐겨 그렸다. 위 그림을 보면 풍성한 잎사귀가 매달린 나무와 그 나뭇가지에 앉은 네 마리 새 그리고 그 나무 밑에서 편하게 누워 있는 사람이 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자연을 관찰하면서 나무가 지닌 신비한 생명력에 감동하곤 했다. 그래서 나무가 자라는 자연환경을 가진 곳에 사는 민족들은 저마다 나무에 대한 전설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단군신화에도 신단수라는 신령스러운 나무가 등장하는 것과 같다. 나무는 새와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존재이자 사시사철 변치 않는 상록수는 영원한 생명을, 철마다 변화하는 나무들은 생명의 순환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장욱진은 이런 나무와 새를 통해 생명에 대한 애정과 자연으로의 회귀를 그린 화가이기도 했다. 위의 그림에서처럼 사람은 나무 밑에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석가모니는 보리수 밑에서 오랜 명상 끝에 도를 깨우쳐 부처님이 되었다. 어찌보면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가 벌거벗고 드러누워 그의 시선으로 하늘의 구름을 올려다보는 것같고, 어찌보면 석가모니 부처가 득도한 뒤 득의만면한 미소를 띄운 채 잠시 쉬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당신의 눈에 보이는 저 하늘은 과연 어떤 것일런지.







진진묘, 캔버스에 유채, 33.0×24.0㎝, 1970 - 1970년 1월 3일 불경을 외우는 아내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덕소로 돌아가 7일 낮밤을 식음을 전폐하고 그렸다는 아내의 초상화 그림이다. 아내의 모습에서 불성을 발견한 것이겠지만 그냥 보아서는 불화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그림이 참 묘하다. 표정하며 자세하며 아내같기도 하고, 보살같기도 하고.....그래서인지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화가는 몇 개월동안 앓아 누웠고, 이를 불길하게 여긴 화가의 부인이 다른 사람에게 팔아 버렸다. 이 작품을 자신의 대표작이라 여긴 화가는 이를 두고두고 아까워했다고 한다. 화가 자신이 직접 제목을 붙인 몇 안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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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과 방, 캔버스에 유채, 22.0×27.0㎝, 1973 - 마치 알타미라 동굴 벽화의 한 부분을 보는 것처럼 단순화된 그림이다. 이 그림이 내게는 꼭 남편과 아이는 밥달라고 보채는데 부엌에는 더 이상 먹을 거리가 하나도 남지 않아 시름에 젖은 아내의 모습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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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1988, 캔버스에 유채, 35x35cm - 해와 달과 소와 화가 자신으로 보이는 노인이 각기 네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그 한 가운데에는 거대한 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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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일명 보리밭) 종이에 유채 14.8x10.8cm 1951 
 

 
자화상(自畵像)의 변(辯)
" 일명「보리밭」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이 그림은 나의 자상自像이다.
1950년대 피난중의 무질서와 혼란은 바로 나 자신의 혼란과 무질서의 생활로 반영되었다. 나의 일생에서 붓을 못들은 때가 두 번 있었는데 바로 이때가 그중의 한번이었다. 초조와 불안은 나를 괴롭혔고 자신을 자학으로 몰아가게끔 되었으니 소주병(한되들이)을 들고 용두산을 새벽부터 헤매던 때가 그때이기도 하다.
고향에선 노모님이 손자녀를 거두시며 계시었다. 내려오라시는 권고에 못이겨 내려가니 오랜만에 농촌자연환경에 접할 기회가 된 셈이다. 방랑에서 안정을 찾으니 불같이 솟는 작품의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물감 몇 개 뿐이지만 미친 듯이 그리고 또 그렸다. 「나룻터」,「장날」,「배주네집」. 이「자상自像」은 그중 하나이다. 많은 그림들이 그 역경 속에서 태어났니 동네사람들이 가인이라 말하도록 두문불출, 그리기만 했던 것이다. 간간이 쉴 때에는 논길 밭길을 홀로 거닐고 장터에도 가보고 술집에도 들러본다. 이 그림은 대자연의 완전 고독속에 있는 자기를 발견한 그때의 내 모습이다. 하늘엔 오색 구름이 찬양하고 좌우로는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 고독은 외롭지 않다"
<畵廊 1979년 여름호>
 


  그렇다면 과연 장욱진은 신선으로, 인간과 자연 사이의 기원과 소원 성취라는 방식으로 상호교감하며 소통해왔던 개념, 인간과 자연이 강제로 구분되지 않던 시대의 인간으로서 세속도시에서 행복할 수 있었겠는가를 우리는 물어보아야 한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되시는 분들은 다소 불경스럽긴 하지만 다카하다 이사오의 애니메이션 작품 <헤이세이 너구리대전쟁 폼포코>에서 인간에게 자연을 빼앗겨 도시로 숨어들어 살아야 하는 너구리들을 상상해보시길. 음, 아무리 생각해도 불경스럽긴 하다).
죽음과 삶의 경계를 경험하다 - 아버지의 죽음
  반도의 척추인 백두대간이 백두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다 양 갈래로 금북정맥과 한남금북정맥으로 나뉘는 충청남도 연기군 동면 송룡리 105번지 전통적인 한옥에서 태어난 사내 아이가 있었다. 앞으로는 부용산에서 발원하여 금강으로 이어지는 미호천이 흐르고, 안채 뒤로는 높다랗게 솟아난 나무 위로 까치집이 있는 이 한옥은 장기용, 이기재 부부의 살림집이었다. 장욱진은 이들 부부의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장욱진의 아버지 장기용은 선친 때부터 제법 재산을 모은 부유한 집안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집안의 농사 일을 거드는 틈틈이 스스로 병풍을 만들고, 거기에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장욱진의 아버지는 어린 자녀들에게도 틈틈이 습자를 하게 했고, 그 가운데 잘된 것이 있으면 벽에 걸어두고 이를 지켜보며 흐뭇해했던 자상한 사람이기도 했다. 장욱진은 아버지가 시서화를 즐겼고, 또한 멋쟁이었다고 회상하며, '흰 구두에 중절모 차림으로 마실 나가는 아버지의 저고리 한쪽으로 번쩍이는 회중 시계가 보일 때면 아버지의 모습이 참말로 멋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어린 장욱진의 집에는 종종 이름있는 승려들의 내왕이 있었을 만큼 불교와의 인연이 깊었다. 그것은 장욱진의 아버지 장기용의 집안이 대대로 불교 집안이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의 집안이 비교적 재산도 넉넉한 편이라 인근 사찰에 물질적인 시주도 종종했기 때문이다. 단지 물질적인 시주뿐 아니라 불교에 대한 이해도 깊었던지 장욱진의 아버지 장기용은 고향 마을 부근의 명사찰인 수덕사의 이름높은 선승인 만공 스님의 제일 가는 신도 중 한 사람이었다. 화가의 아버지는 자녀의 신식 교육을 위해 서울로 시집 간 누이의 설득에 따라 일가족으로 모두 서울로 이사하게 했다. 이때가 장욱진의 나이 여섯 살 무렵의 일이었다. 그런데 화가가 일곱 살 나던 해인 1923년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전염병에 걸린 친척 문병을 갔다가 거기서 병에 옮아 고향에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젊은 나이에 혼자된 어머니와 장욱진의 가족은 서울에서 고모의 돌봄을 받아야 했는데, 막내 동생 시진은 유복자였다. 장욱진의 형제는 모두 4명이었다. 둘째로 태어난 장욱진은 아버지가 안 계신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맏형을 아주 어려워하고 따랐다. 그리고 밑으로 동생 성진, 시진이 있었다.
  그가 까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의 일이라고 한다. 인류는 원형상징  체계에서 새는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고가는 메신저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왔다. 어린 장욱진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징이라는 것이 원시 시대부터 이어져 오는 경험 이전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에게 까치 혹은 새가 훨훨 날아오르는 것이, 사람의 영혼이 신들의 세계로 올라가는 것으로 여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린 장욱진에게 까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의 나무 가지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는 아버지였거나 자신을 세상에서 훨훨 자유롭게 만드는 존재였을 것이다.
호랑이 큰 고모와 화가로서의 입문 과정
  버지의 죽음 뒤 장욱진 가족의 살림살이는 고향의 둘째 큰아버지가 보내주는 살림과 호랑이같은 고모의 돌봄이 컸다. 큰 고모는 이들 형제의 교육에 많은 힘을 썼다. 장욱진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자식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을 만큼 강한 분이었지만 시누이인 고모 앞에서는 늘 시집살이하듯 살아야 했다. 남편 없이 아들 사 형제를 교육시키고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장욱진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낼 무렵 우리나라는 아직 일본의 식민지였다. 경성사범부속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한 장욱진은 이때에도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 하지만 그림이라면 당연히 그리는 대상과 꼭 닮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일본인 교사들은 장욱진의 그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때 그의 미술 성적은 늘 병(丙)에 머물렀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서도 늘 그림을 그리던 장욱진이었지만 호랑이 같은 고모는 공부는 안하고 늘 그림에만 몰두하는 어린 장욱진을 야단치곤 했다. 그런 탓에 장욱진은 고모 몰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마치 바흐가 그러했듯이 방문을 잠그고 몰래 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일본에서 새로운 미술 선생이 부임해 왔다. 그는 일본의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갓 부임해온 선생님이었다. 그는 장욱진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비범한 재능을 발견하고 그로 하여금 일본의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가 주최하는 '전국 소학생 미전'에 내보내도록 해주었다. 전국 소학생 미전이라는 것은 당연히 일본과 조선을 통틀어 미술에 재능있는 초등학생들이 참여하는 대회였다. 장욱진은 이 대회에서 일등상을 받았고, 전교생이 모인 조회 시간에 상장을 수여받는 행사를 치렀다. 그는 훗날 상에 대해서 '어린 나이에 상을 주어 칭찬해주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것은 좋지만 상이란 것이 예술가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어쨌든 이런 수상 실적은 미술에 대해 그다지 조예가 없는 교사들도 그의 그림실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는지 이후 그의 미술 성적은 거의 갑(甲)이었다.
 장욱진은 14살이 되어서 경성제2고등 보통학교(지금의 경복고등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 미술반 활동을 하면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장욱진은 그다지 활달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올바르지 못한 일은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3학년 때의 일이었는데 일본인 역사 선생이 공정치 못한 일을 하자 여기에 대들어 따지다가 결국 이 일 때문에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다. 역시 그 선생도 문제가 있었던지 만주로 쫓겨가게 되는데 나중에 감옥에 가고 말았다고 한다. 어쨌든 학교에서 쫓겨난 장욱진은 주변의 화가, 조각가들과 어울려 다니며 그들의 아뜰리에를 제 집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집안 살림을 도맡아야 했던 장욱진의 고모는 그가 공부는 안 하고 매일 그림만 그린다고 장욱진의 종아리를 때렸다. 고모는 "세상에서 첫째, 둘째가는 화가가 되면 모를까"하면서 때렸지만 장욱진은 종아리를 맞으면서도 발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좀 더 큰 세계와의 만남 - 만공선사
  연의 일치이긴 했지만 호랑이 같은 큰 고모에게 종아리를 맞은 얼마 뒤 장욱진은 전염병인 성홍열을 앓게 되었다. 요양을 위해 장욱진은 가족들과 떨어져 예산 수덕사로 떠나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가 열일곱살 때였다. 그곳에는 옛날 그의 아버지와도 인연이 깊었던 만공 선사가 있었다. 만공선사는 경허의 제자로 일제 시대 때 조선불교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분이었다. 만공은 조선총독부 주최로 열린 불교 회의에서 당시 일제의 불교 정책에 반대하며 데라우치 총독이 듣는 앞에서 "전 총독 미나미는 한국 불교를 파괴시켰으므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 그를 우리가 지옥에서 구하지 않으면 누가 구하겠는가?"라고 말할 만큼 민족의식과 기개가 높은 이였다. 장욱진은 수덕사에서 요양하는 동안 만공선사의 방에서 머물면서 때마침 그곳을 찾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을 만나게 된다. 당시 나혜석은 한때 함께 활동했던 일엽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잠시 머물고 있던 차였다. 일엽은 본명이 김원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잡지인 <신여자>를 만들었던 이로 기독교 집안 출신의 신여성이었지만 뜻한 바가 있어 출가한 이였다. 만공은 나혜석으로 하여금 경내에는 머물지 못하게 하고 일이 있을 때만 오가도록 했다고 한다.
  장욱진이 수덕사의 아름다운 대웅전(혹자는 몬드리안의 그림보다 더욱 아름다운 면구획이라고 평했다지만 보면 그 평과는 상관없이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건축물이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만공과 나혜석을 통해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나혜석은 장욱진의 그림을 보고 자신이 그린 그림보다 좋다고 칭찬해주었다고 한다. 만공은 장욱진을 출가시키려고 했지만 그의 뜻과 재능이 불도보다는 그림에 있음을 알고 "네가 하는 일과 불도에서 하는 일이 똑같다"는 말을 하며 출가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려보낸다. 반년간의 수덕사 요양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그는 스무 살이 되던 1936년 봄 양정 고등보통학교(지금의 양정고등학교) 3학년에 체육특기생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양정고등학교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동양인 최초로 마라톤 금메달을 따낸 손기정 선수의 출신 학교였다. 장욱진은 당시로서는 키도 컸고, 체격이 좋아서 높이 뛰기와 빙상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장욱진은 운동보다는 그림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양정고보 4학년 때인 1937년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학생 미전에서 그의 작품 두 점이 가작상을 받았고, 같은 해 조선일보에서 주최한 제2회 전조선학생 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이 때 심사위원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꼽히는 고희동을 비롯해 조각가 김복진, 이당 김은호 등이었다.
  하지만 장욱진은 상이란 것에는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는 남의 평가보다는 자기 자신의 만족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 받은 상을 누구보다 내심 기뻐했던 사람은 그의 고모와 가족들이었다. 상금 백원을 받은 장욱진은 그 돈으로 고모에게 비단 옷감을 끊어 드렸다. 조카 장욱진이 최고상을 받아오자 결국 고모는 그의 재능을 인정해 "세계에서 첫째 가는 화가가 되려면 모를까"라며 이때부터 화가가 되려는 장욱진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장욱진의 노력과 재능이 완고했던 가족의 반대를 무너뜨리고 일본 유학까지 후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동경유학생 장욱진의 조국
  1939년 양정고보를 졸업한 장욱진은 먼저 일본 유학을 다녀 온 형의 도움을 얻어 그 해 4월에 일본 동경의 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게 됩니다. 이 무렵 일본은 조선에서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고, 우리 민족 정신을 없애기 위해 신사 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조선인들의 이름과 성씨를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하는 창씨개명을 강제했다. 장욱진의 집안도 결국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장욱진은 일본에 가서는 오히려 창씨개명 전의 이름을 사용했다. 당시 일본에 유명한 미술학교는 동경미술학교를 비롯해 몇 군데가 있었지만 장욱진을 비롯한 조선인 유학생들은 대개 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왜냐하면 이 학교는 일본 역사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입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학생들은 민족 의식의 발로로 일본 국사를 무시해 공부하지 않았고, 그림에 학력이 무슨 관계냐는 생각에서 일부러 제국 미술 학교를 찾았다. 더군다나 제국 미술 학교는 신진 학교였기 때문에 교풍이 다른 학교들에 비해  자유로운 편이었기 때문에 예술은 자유로와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학생들은 이 학교를 선호했다.
  다른 학교에 비해 자유로운 편이라고는 하지만 장욱진에게는 제국미술학교의 교육 역시 답답했다. 이 무렵 일본은 자신들의 중국 침략 행위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석유금수조치로 인해 서구 제국과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이들과의 피할 수 없는 일전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점차 강화되는 군국주의 기운은 국수주의를 불러 일으켜 모든 일본적인 것이 가장 애국적인 것이라고 강요했다. 때문에 일본풍을 따르지 않는 장욱진의 그림은 일본인 교수들에게 늘 꾸지람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당시 일본은 서양에 수많은 유학생들을 보내며 그들의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일본은 서구의 정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들의 화풍과 사조를 따라가는 데 더 급급했고, 어떤 것은 매우 편협하게 이해하기도 했다. 이 시기 일본이 자랑하는 서양화가들의 상당수가 오늘날엔 다만 서구 화풍의 아류로 분류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그것은 우리 미술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는 자유로운 새의 세계와 고향의 야트막한 언덕들과 군더더기 없는 우리의 건축 양식을 보면서 서양의 것이 아닌 우리의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결심한 장욱진에게 꽉 막힌 것 같은 일제 시대의 대학 생활은 매우 고달픈 것이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장욱진은 이런 괴로움을 나중에 자신의 제자인 조각가 최종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림을 멋대로 그린다고 일본에서 공부할 때 선생들이 지적했다. 그때 주위에서 내 그림에 일본풍이 안 보인다고 싫어했다." 일본에서의 유학 시절 장욱진과 그의 친구들인 조선인 유학생들은 민족 감정 때문에 일본 학생들과 자주 다투었다고 한다. 그러나 싸움이 끝난 뒤에는 늘 조선인 학생들만 경찰에 잡혀가야 했고, 심지어는 일본인 경찰들이 조선인 유학생들의 하숙방까지 수색하거나 주인도 없는 집에 들어와서 무얼 그리고 읽는지 감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장욱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는 일본인 교수와 동료 학생들도 있었다. 프랑스의 조각가 앙투완느 부르델의 제자였던 시미즈 다카시와 기우치 요시 같은 이들은 장욱진을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며 제자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했다. 장욱진은 이런 일본인 선생님들을 존경하기는 했지만 앞서 자신의 제자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자신만의 멋과 그림을 스스로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혀 나간다. 그는 유명한 누군가의 제자로, 누군가와 비슷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걸어 가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아무도 걸어보지 못한 매우 힘들고 고독한 길이었다. 아무도 걷지 않았던 길을 가야하는 선구자에 대한 사회의 처벌.
전쟁의 슬픔에 취하고, 술로 휴식을 얻은 화가
  욱진은 일본 유학 중에 역사학자 이병도의 맏딸 이순경과 결혼했다. 이병도는 우리 역사학의 태두이자 우리 역사를 실증사학(어찌보면 싫증사학이지만)이라는 무미건조한 학문으로 고정시킨(더욱 큰 문제는 사관이 없다는) 책임이 있다고 비판을 당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본이 식민사관을 강제로 주입하려고 할 때, 우리 학자들이 모여 이에 저항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든 것이 '진단학회'였다. 한국어 사용조차 금지당하는 시대에 자신의 사재를 털어가며 학회를 이끌고 '진단학회보'를 만든 업적은 후세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부정당해야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역할은 긍정적이었다. 어쨌든 장욱진은 이순경과 결혼한 뒤 평생토록 변치 않는 사랑을 함께 했다. 늘 혼자였던 까치에게 가족이 생긴 것이다. 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장욱진은 이미 한 아이의 아버지였지만 일제 징용에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그가 징용에 끌려간 지 9개월만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일본에 대한 장욱진의 반감은 매우 컸다. 그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외국 여행 중 어쩔 수 없이 일본어를 해야할 때라도 자신은 일본말을 한 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해방은 찾아왔지만 아직 나라의 꼴이 갖춰지지 못한 상태였고, 화가가 할 만한 일자리는 쉽게 나지 않았다. 이제 여러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 장욱진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시기였을 것이다. 때마침 박물관에서 일하게 된 장욱진은 박물관 직원으로 개성과 경주의 고분 발굴 작업에 참여하며 우리의 옛날 벽화들을 볼 수 있었다(이건 순전히 추측이지만 그의 특징적인 회화 기법 중 하나인 캔버스에 밑칠을 해놓고, 그림을 그린 뒤 유화물감을 다시 긁어내는 방식의 유화들에서는 어쩐지 고분 벽화의 느낌이 든다. 벽화가 프레스코 기법이랄 수 있는 회칠된 벽이 채 마르기 전에 색채 물감을 이용해 채색이 벽 안쪽까지 침투해 들어가도록 한다는 점에서 캔버스에 밑칠을 한다는 것이 그렇고, 그것을 다시 긁어내 캔버스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만드는 것은 고분의 채색이 떨어져 나간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음, 최소한 현재까지 내가 읽은 그와 관련된 서적이나 논문에서는 그가 고분 벽화 발굴 작업에서 어떤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해석을 가한 것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마추어 감상자인 입장에서 다만 추측이라고 단서를 달아둔다. 누군가 미술평론을 전공하는 이가 있다면 한 번 연구해 주었으면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박물관에서 일하는 동안 우리 선조들의 공예품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감상하며 공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천성이 그러했기 때문이든 무능하다는 혹평을 들었기 때문이든 얼마 안가 자의로 박물관을 그만두었다. 그의 천성이 조직생활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물관 일을 그만둔 장욱진은 동료 화가들과 모임을 만들어 열심히 작업에만 몰두했다. 일본의 식민지를 막 벗어난 신생공화국의 활기는 모두에게 새로운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이때 그와 함께 활동한 화가들은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등으로 이제는 모두 거장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었다. 장욱진은 좌우이념의 혹독한 대립 속에서 좌, 우 모두로부터도 손짓 받았지만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가족을 먼저 피난보냈지만 자신은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한다. 장욱진은 혼자 피난을 떠나기 전에 잠시 인공 치하에서 강제로 끌려나와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동원되기도 했다. 그의 회상에 의하면 넥타이를 그렸다고 하는데 그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더 이상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이것이 장욱진에게 해당하는 일은 아니지만 당시 남한 사회의 문화·예술계 인사들 중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았던 일부는 북에 대해서 혹은 북의 체제에 대한 호기심에서 부러 피난을 늦춘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화가는 피난 시절 한동안 교편을 잡기도 하고, 전쟁 그림을 그리는 종군화가단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은 그에게도 깊은 상처를 주었다. 장욱진은 그때 종군화가상을 받았는데 상장은 버리고, 상금만 들고 와서 술이나 마시자고 외쳤다고 한다.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전쟁을 그리고 받은 상장과 상금에 대해서 그는 아무런 미련도 없었던 것이다. 화가 장욱진의 일생은 술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가 그토록 폭주(爆酒)하기 시작한 것은 전쟁을 경험하면서 부터의 일이었다.

Fine Art

화가 장욱진의 삶과 죽음


 장욱진 그림이 갖는 의미는 평자들이 따질 일이다. 나 같은 애호가가 보기엔 자유분방이 특징인 조선시대 민화의 특질을 서양화 기법으로 수용, 그걸 확고부동한 한국사람의 그림 곧 한국화의 경지로 올린 점 그리고 철저한 작가적 자유를 고집하는 생활 방식이 이중섭의 경우처럼 ‘신화’가 되고 그게 일반인들의 서양화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자극했다는 점이겠다. 아름다움은 착함과 통한다는 우리의 전통대로 그는 줄곧 이상향을 찾는 도인의 한일한 경지를 화폭에 담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보면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 한송이 꺾어 들고 멀거니 남산을 바라본다”는 도연명의 시가 연상된다.

단순한 그림, 단순한 삶 내가 처음 만났을 때는 그의 나이 ‘일곱살’ 때였다. 나이는 먹는 게 아니라 뱉어야 한다면서 쉰일곱 나이를 그렇게 말했다. 나이를 뱉어버림으로써 아이들이 갖는 순수에로의 희귀가 한평생 그가 추구한 지향이었다. 그가 일관되게 주장한 말이 있다. “나는 심플하다”였다. 장욱진 그림의 매력은 단순함에 있다. 단순은 그림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러니 아이들도 좋아하고 그림감상의 연조가 깊은 어른들도 애호한다. 그만큼 보편성을 얻었던 것이다.

 단순으로 일관하자면 세속의 갖가지 체면과 부담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거기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는 그럴 만한 용기를 가졌다. 사회지위를 통해 자신의 그릇을 확인하는 것이 보통사람의 질서인데 장욱진은 서울대 미술대학 교수자리를 몇년만에 걷어치운 뒤 자연이 넉넉한 시골로 떠돌았다. 덕소의 시멘트 상자집에서 사고무친한 사람처럼 홀로 끼니를 꾸려가면서 12년을 보냈다. 다시 서울을 훌쩍 떠나 수안보의 담배 농사집 토방에다 화실을 차렸다. 아내와 함께였다는 점을 빼고는 궁벽하기가 덕소와 다름 없었다. 수돗물이 부족했던 수안보 6년은 도시 달동네의 삶 그대로였다.

 그가 그림으로 생활을 꾸릴 수 있게 된 것은 지난 10년에 불과했다. 거의 한평생 그림에 대한 사회의 인식과 성원이 없었던 시절을 살았다는 뜻이다. 가정경제는 아내가 도맡았고 그는 그림만 고집했다. 옛말에 “남자가 처자와 집에 매인 것이 감옥보다 심하다. 감옥은 풀려날 기미가 있지만 처자는 잠시도 마음을 멀리할 수 없구나”했다. 그럼에도 보통사람들과 달리 가정생활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를 누렸던 ‘무모한’ 용기의 사람이었기에 세상은 그를 기인이라 부른다.

평생 붓을 놓지 않았던 자유인 평생에 그가 지녔던 자부심은 온갖 궁벽 속에서도 “한번도 붓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자부심만큼이나 자책감을 갖고 있었다. “나는 한평생 그림 그린 죄 밖에 없다”고 했다. 죄의식이 잠재할 만도 했을 것이다. 오늘날과는 달리 그가 그림을 시작했던 시절만 해고 화가의 길은 천형의 길이었다. “미술은 취미도 열정도 아니다. 그건 삶의 전부였다”라던 어느 유명 서구화가의 술회는 바로 장욱진의 경우였다. 그러기에 진작 장욱진의 그림을 평가했던 전 국립박물관장 김원룡 교수는 그의 사람됨을 일컬어 “붓만 빼앗으면 그 자리에 앉은 채 빳빳하게 굶어죽을 사람”이라 했다.

 생활 부담으로부터의 자유에 어찌 보통사람다운 고뇌가 없었겠는가. 술의 탐닉도 따져보면 그런 고뇌의 한 표출이었을 것이다. 화가의 가난이 더욱 음주벽을 자극하기도 했다. 배가 고파도 밥 사달라는 것은 어딘지 궁색해서 자꾸 술만 얻어먹게 됐다는 것이다. 책임을 회피하는 자유는 무의미하다. 그의 지독한 주량에도 불구하고 장욱진이 붓을 들어 그림에 몰입하면 술은 몇 달이고 한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곤궁으로부터 자유를 보장한 따뜻한 가정이 있었다는 점에서 장욱진은 행운아였다. 그러나 다시는 그런 자유인을 감쌀 가정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철저한 자유인이 없다면 예술은 얼마나 건조할 것인가. 서구에서는 예술가의 자유정신을 보장해줄 수 있는 사회제도를 여럿 마련하고 있지만 이 점에서 우린 아직 요원하다.

 일을 하기 위해 몸뚱아리는 소모해야 한다고 말하던 장욱진. 5백점 가까운 유화작품을 남기고 일흔네살로 한평생을 마감했다. 그의 방식대로 말한다면 더욱 아이의 경지에 가까이 간 ‘네살’의 나이로 한줌의 재로 돌아갔다. 무로 돌아간 게 아니라 절대자유를 찾아나선 길이었겠다.
시사저널

2017년 6월 20일 화요일

You are in your TIME ZONE



You are in your TIME ZONE

저마다 다른 인생의 '시간대(Time Zone)'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55세에 은퇴했는데(retire at 55), 도널드 트럼프는 70세에 그 후임 대통령으로 취임했다(be inaugurated as the next president). 누구는 앞서가고(go ahead), 누구는 한참 뒤처져 있는(lag far behind) 듯하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길에서 자기 나름의 속도로 자신의 경주를 펼치는(run their own race) 것이다. 누가 더 잘나가는 건지는 나중 돼 봐야 안다."

유튜브 동영상에 나오는 내용이다. 제목은 'You Are In Your Time Zone.' 인생살이에 성공하지 못했다고(go nowhere in life) 낙담하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다.

"뉴욕은 캘리포니아보다 3시간 빠르다(be 3 hours ahead of California). 캘리포니아는 굼뜨고, 뉴욕은 빠르다는 얘기가 아니다. 각각의 시간대에 맞춰(be based on their own time zone) 살아간다는 것이다. 누구는 진작에 결혼을 했는데(get married) 누구는 아직 독신이다(be still single). 어떤 이는 난생 첫 프러포즈를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이는 벌써 과거를 치유하고(heal themselves from the past) 새 사람을 만나려 하고 있다(be ready to meet someone new).

아기를 갖기 위해 10년을 기다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결혼한 지 1년도 안 돼 아기를 낳는(give birth to a baby within a year of marriage) 이도 있다. 누구는 22세에 졸업해(graduate at the age of 22) 5년 후에야 겨우 취업했는데(secure a job), 누구는 27세에 졸업해 곧바로 좋은 직장을 얻었다(land a decent job). 어떤 사람은 25세에 최고 경영자가 됐다가(become CEO) 50세에 죽고, 다른 어떤 사람은 50세에 CEO가 돼 90세까지 산다.

동료(colleague), 친구, 후배(younger one)가 당신을 앞서가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might seem to go ahead of you). 누군가는 당신보다 뒤처져 있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들을 시기하거나 부러워하지(begrudge or envy them) 말고, 그들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지(disdain or mock them) 말라. 모든 사람은 자신의 시간대에 따라 일하고, 그 속도에 따라 이뤄진 것들을 얻는다(have things worked out according to their pace). 당신은 당신의 '시간대'에서 열심히 뛰면 된다.

당신이 잘되는 시간도 곧 올 것이다. 견뎌내라(Hold on). 강건해라(Be strong). 당신 자신에게 충실하라(Stay true to yourself). 축복을 누려라(Stay blessed). 건강, 사랑하는 가족, 건강하신 부모님(healthy parents), 사랑해주고 마음 써주는(love and care about you) 친구 등 당신이 지금 가진 것들에 행복해하라(Be happy for what you have now). 늦지 않았다(be not late). 이르지도 않다. 당신은 당신 시간대의 딱 제시간에 와 있다(be just on time)."
조선일보

굳고 퇴화한 뇌…말랑말랑, 생생하게 되돌려볼까 ②

50+ 건강 리모델링 다섯 번째


뇌 건강을 유지하는 운동법과 음식을 소개한다.
Part 3 뇌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 8가지
나이 들면 뇌세포가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뇌의 기능을 좌우하는 것은 뇌세포 수가 아니다. 뇌를 자주 사용할수록 뇌세포 연결망이 촘촘해진다. 뇌세포 연결망이 많고 촘촘할수록 뇌가 건강하다고 평가한다. 뇌는 열심히 단련하면 연결망이 발전한다. 쓰면 쓸수록 연결되는 부위가 늘면서 뇌 기능이 좋아진다. 뇌는 역동적인 기관이다. 자신의 노력과 관리 여부에 따라 뇌 건강은 달라질 수 있다. 이처럼 뇌 건강이 노력 여하에 달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뇌 노화를 늦추려는 이들이 늘고 있다. 뇌 건강을 위해선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한다.
기억력 강화 훈련법
1. 책·신문 등을 읽고 내용 요약하기
2. 새로운 이름, 전화번호 3개 이상 외우기
3. 펜이나 연필로 일기 쓰기
4. 노래 1곡 외워 부르기
5. 30분 이상 걷기
6. 술과 담배 끊기
7. 균형잡힌 영양 식사(등푸른 생선, 과일, 견과류)
다음은 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 8가지를 소개한다.
1. 정기적인 운동
운동이 알츠하이머 발병을 낮춘다는 사실은 여러연구를 통해 입증된 사실이다. 육체적인 운동이 뇌의 유연성을 증대시켜 뇌의 인지기능과 건강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뇌 운동은 흔히 계산을 하는 등의 운동법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신체 움직임을 통한 정보전달로도 뇌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 손 운동의 경우 신체의 어느 기관보다 뇌를 활성화시킨다. 특히 평소 쓰지 않던 손을 사용하는 것이 뇌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 이외에도 걷거나 뛰는 등 발바닥을 자극시켜 균형과 인지기능을 맡고 있는 소뇌 발달을 도울 수 있다. 명상의 경우는 전두엽의 피질 감소를 막고 더 두껍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뇌에 자극을 주는 좋은 운동법엔 걷기가 있다. 하루에 20분을 걸으면 뇌졸중 같은 뇌질환 발생 위험이 낮아지고, 매일 3km 이상 걸으면 치매 위험이 70% 낮아진다는 보고가 있다. 걷기는 팔과 다리를 움직이며 균형을 잡는 행위이기 때문에 뇌에 많은 자극을 주게 된다. 이동 과정에서 주변 공간을 시각적으로 파악하는 일도 뇌세포를 활성시킨다. 이외에도 뇌 혈류량을 증가시키는 달리기나 수영, 자전거타기 등이 도움이 된다.
2. 모임 자주 갖기
사회적 유대관계는 인지기능을 높인다. 모임을 자주 갖고 사회적 유대를 가진 노인의 경우 인지기능을 잃을 위험이 가장 낮다. 대인관계는 지적 자극을 지속적으로 주는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또 사회적 유대가 끈끈해질수록 삶의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고, 스트레스가 뇌에 주는 부정적 작용을 감소시킨다. 가장 좋은 대인관계는 만날 때 스트레스 없이 유대감을 느끼고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되는 관계다.
3. 충분한 숙면
숙면은 기억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성인에게 필요한 수면시간은 평균 7시간이다. 잠을 충분히 자야 뇌가 휴식기를 가질 수 있다. 잠이 부족하면 깨어 있어도 뇌는 비몽사몽인 상태가 된다. 기억력 저하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많은 현대인은 불면증을 경험하기 때문에 숙면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수면 시간을 일관되게 유지하도록 하고, 방 안엔 불빛이 없도록 어둡게 만들어야 한다. 낮에는 수면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카페인 섭취를 줄이고 낮잠을 피하거나 제한하는 것이 좋다.
4. 건강 식단 유지
건강한 식단은 뇌 건강에 매우 중요하다. 뇌 건강을 위해선 과일과 채소, 견과류, 생선 등 영양 균형이 갖춰진 식사가 필요하다. 반대로 기름기가 많은 육류·마가린 등 불포화지방산, 영양소는 적고 칼로리는 높은 가공식품은 고콜레스테롤·심뇌혈관질환 등을 일으킬 수 있어 섭취를 제한해야 한다.


뇌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 8가지
5. 취미 만들기
평소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활동은 뇌에 활력을 준다. 다양한 취미는 지적 자극을 만들어 기억력 강화와 인지기능 향상에 도움을 준다. 실제로 지적 자극을 받는 활동에 규칙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치매 진단을 받을 가능성이 적다. 평생 학습자로 사는 것이 뇌 건강에 좋다는 것이다. 굳이 학교가 아니라도 된다. 악기를 연주하거나 독서, 전략적 생각을 요구하는 게임 등 다양한 취미활동이 있다. 평소 하고 싶던 활동을 하면 된다.
6. 담배 끊기
흡연은 심혈관질환이나 기억력 감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혈관을 좁히는 흡연은 뇌혈관질환의 원인이기도 하다. 흡연과 인지기능 상관관계 연구에 따르면 흡연이 언어 기억력이나 시각적 처리 속도를 떨어뜨렸다. 흡연은 죽상경화증이나 고혈압에 따른 뇌혈관 손상 등을 일으켜 인지기능 저하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추측된다.
7. 금주
과음이 기억력 저하를 불러온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과음은 뇌신경세포를 파괴한다. 그동안 소량이나 적정 음주는 뇌혈관질환 감소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왔다. 하지만 대규모 장기 추적 연구결과, 적정음주도 장기간 지속되면 뇌 부피를 줄이는 것으로 보고됐다. 따라서 하루 반 잔의 술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평소 술을 많이 마신다면 끊는 것이 기억력 감퇴를 막을 수 있다. 술을 끊기 힘들다면 폭음을 피하고 적절한 음식 섭취와 함께 천천히 음주하는 것이 뇌 손상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물론 표준 음주는 맥주 한 캔, 와인 한 잔 정도의 양이다.
8. 비타민 복용
비타민C의 항산화 효과가 기억력 감퇴를 방지한다. 항산화제는 뇌 조직을 파괴하는 유해활성산소와 싸운다. 일본의 한 연구에 따르면 71~93세 대상으로 비타민 C와 E를 장기간 복용시킨 결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혈관계 치매 발생이 88% 적었다.


Part 4 뇌 건강에 도움이 되는 음식
성인 뇌 부피는 최대 1350cc 정도지만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으로 얻는 영양소의 20%를 소비한다. 따라서 뇌 건강을 위해선 좋은 영양소를 섭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두뇌 활동에는 단백질과 탄수화물, 비타민 등을 주로 사용한다. 따라서 두뇌 활동의 주요 에너지원을 적절하게 공급할 수 있는 영양 섭취가 필요하다.
1. 짜지 않은 견과류
호두나 아몬드 등 소금을 치지 않은 견과류는 뇌 건강을 좋게 만든다. 견과류에는 불포화지방산, 아르기닌, 마그네슘 등 다양한 영양소가 풍부해 콜레스테롤을 낮춰주고 혈중 중성지방을 낮춰 뇌혈관질환 예방을 돕는다. 단, 견과류의 70%는 지방이기 때문에 적당히 먹어야 한다.
2. 단백질이 풍부한 흰색 육류
뇌 건강을 위해선 닭가슴살처럼 기름이 적고 단백질이 풍부한 흰색 육류를 매일 섭취해야 한다. 한국인은 주로 탄수화물을 섭취하기 때문에 대사증후군 위험이 높다. 지나친 탄수화물 섭취는 비만과 당뇨병 위험을 높여 뇌 건강을 해칠 수 있다. 기름기가 적은 흰색 육류는 단백질 섭취를 통해 뇌 건강을 돕는다.
3. 항산화 효과가 높은 녹황색 채소
당근, 시금치 등 녹황색 채소는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해 항산화 효과를 통해 뇌신경과 뇌혈관 건강 유지에 도움이 된다. 특히 당근과 시금치에 풍부한 알파리놀산은 체내에서 DHA류로 바뀐다. 또 콩류에 많은 레시틴 성분은 기억력을 높여주는 아세틸콜린이란 신경전달물질의 원료가 된다.

오메가3 풍부한 등푸른 생선이 뇌건강에 도움이 된다.
4. 오메가3 풍부한 등푸른 생선
고등어와 꽁치 등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한 생선은 뇌 기능 활성화와 두뇌 활동에 도움을 준다. 오메가3 지방산을 구성하는 DHA와 EPA는 뇌세포막을 둘러싸고 있는 뇌신경세포와 동일한 성분이다. 오메가3 지방산은 체내에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음식으로 섭취해야 한다.
5. 뇌 건강 높이는 ‘지중해식 식단’
지중해식 식단을 실천하면 중년 뇌 건강을 지킬 수 있다. 지중해식 식단은 주로 생선과 채소, 과일, 견과류 등으로 구성되는데 지중해 연안에 있는 나라에서 즐겨 먹는 식단이다. 가공식품과 탄수화물, 당류, 붉은 고기류를 최소화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다소 부족할 수 있는 지방의 경우 생선기름이나 올리브오일, 견과류를 통해 얻음으로써 뇌 건강에 매우 좋은 식단으로 꼽힌다. 이와 함께 나트륨 함량도 낮아 고혈압 개선은 물론 다이어트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영국 스코틀랜드 애든버러대학 연구에선 3년간 지중해식 식단을 먹어온 노인들이 그렇지 않은 노인에 비해 뇌 부피 감소율이 적었다. 지중해식 식단을 먹어온 노인의 뇌 부피 감소율은 0.5%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굳고 퇴화한 뇌…말랑말랑, 생생하게 되돌려볼까

중장년이 되면 자꾸 깜빡 잊어버리는 일이 잦아진다. 조금 전 들은 이야기도 뒤돌아서면 기억이 안 난다. 기억력이 나빠져 치매가 되지 않을까 두려움이 앞선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중장년의 뇌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노화를 늦출 수 있다.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기듯 뇌도 다시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 중장년부터 시작해야 하는 뇌 건강법에 대해 알아봤다.
50+ 건강 리모델링(remodeling)’
50대 전후의 중·장년층은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는 시기로, 행복한 제2의 삶을 누리기 위해 자신의 건강부터 리모델링(재수선)해야 한다. 오래된 아파트를 리모델링하듯 우리 건강상태를 꼼꼼히 점검하고 재설계·재수선해야 ‘건강 100세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대다수 중·장년층은 높은 업무강도로 인해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 연구에서 건강증진을 위한 운동이나 영양관리가 가장 낮은 연령대는 중·장년층으로 꼽힌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50세 전후에 어떤 준비를 하느냐에 따라 노년의 건강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헬스조선>은 2017년 연중기획 ‘50+ 건강 리모델링’ 다섯 번째 주제로 ‘중장년의 뇌 건강'을 정한것은 노력에 따라 뇌 노화를 늦출 수 있기 때문이다. 7년 뒤 우리나라 노인 치매인구는 100만 명을 넘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지금 당장 건강한 뇌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뇌는 중추신경계를 관장하는 필수 기관이다. 1000억 개의 신경세포와 각 신경세포를 이어주는 1000조 개의 신경연결망으로 구성돼 있다. 뇌는 기억과 사고를 담당하는 전두엽부터 운동 명령을 내리는 두정엽 등 다양한 기관으로 나눠져 있다. 따라서 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인간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능력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뇌는 나이가 들면서 뇌 신경세포 반응이 둔해지기 시작한다. 인간의 뇌는 20대에 가장 성숙한 이후 40대가 되면서 서서히 노화가 시작된다. 뇌 신경세포가 수축되고 줄어들며, 신경연결망도 감소한다. 뇌혈관질환이 늘면서 알츠하이머치매 같은 퇴행성 신경질환이 증가하는 것도 노화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나이는 든 사람의 뇌가 모두 동일하지 않다. 뇌 노화가 시작되는 중년의 시기에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남은 생애 동안 뇌가 젊은 상태로 있을지, 늙어갈지를 결정한다. 노화는 퇴행의 과정으로 막기 힘들다. 하지만 건강에 좋은 행동을 실천하면 뇌 노화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
Part 1 노화로 인한 뇌의 변화
조금 전 외운 전화번호가 생각이 나지 않고, 친구와 방금 통화한 내용도 전화를 끊고 나면 잊어버린다. 중년의 많은 이들이 신체보다 뇌 건강에 소홀한 경우가 많다. 깜빡 잊는 일이 생겨도 노화 현상 중 하나라고 넘기게 된다. 실제로 뇌는 늙는다. 뇌가 노화하면 구조적 변화가 생긴다. 뇌신경세포 크기가 줄고, 신경연결망이 작아지면서 뇌 부피가 감소한다. 뇌 부피가 줄면 기억력이 떨어지고 행동반응도 느려진다. 뇌신경세포가 예전처럼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해서다. 일반적으로 노년기에는 젊은 시절에 비해 뇌신경세포의 30~50%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뇌 세포와 세포 사이를 연결하는 신경연결망 수가 줄면서 기억력 감퇴, 정보처리 능력 저하 등으로 이어진다. 뇌신경 전달물질이 줄어드는 것도 뇌 노화의 한 현상이다. 신경전달물질 생산이 줄면서 뇌신경반응 속도가 떨어지게 된다. 나이가 들면 인지 능력이 떨어지는 것도 뇌 노화와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뇌 노화는 막을 수 없을까? 그동안 뇌세포는 한번 파괴되면 재생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왔다. 하지만 최근 뇌세포도 재생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뇌세포 손상을 줄이고 재생을 촉진시키면 뇌 노화를 늦출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노화로 인한 뇌의 변화는 기억력 감퇴나 인지능력이 저하되는 것과는 반대로 판단력이나 종합적인 사고력 등은 오히려 더 우수해질 수 있다. 나이 들수록 현명해진다는 소리가 여기서 나온다. 현명함은 긴급 위기상황에서 빛을 발휘한다. 대다수 중년들은 긴급 위기상황이 발생하면 당황하지 않고 위기상황을 해결할 해법을 빠르게 찾는다.
일례로 화재 현장이나 자동차사고 현장에서 신속하게 상황을 대처하는 이들은 대부분 중년들이다. 감정조절 능력도 젊은 시절과 비교하면 더 뛰어나다. 나이 들수록 충동적 감정을 유발하는 호르몬인 도파민 양이 줄면서 뇌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 비해 기억력은 다소 떨어질지 모르지만 판단력, 감정영역에서 더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안심은 금물이다. 노화는 피할 수 없다. 아직 뇌 건강이 나쁘지 않을 때부터 지켜야 한다. 중년부터 적극적으로 뇌 관리를 해야 뇌 노화 속도를 늦출 수 있다. 뇌 관리를 미뤄 발생하는 뇌질환은 너무나 많다. 이미 뇌질환 증상이 발생하면 늦는다. 중년이 뇌 관리를 미루지 않아야 할 이유다.

뇌의 구조와 기능
인간의 뇌는 크게 대뇌, 소뇌, 뇌간으로 구분한다. 이 중 대뇌는 전두엽과 두정엽, 측두엽과 후두엽으로 나뉜다. 대뇌는 전체 뇌의 80%를 차지한다. 대뇌의 가장 바깥쪽은 대뇌피질로 100억~200억 개의 신경세포가 존재한다. 언어, 사고, 판단, 창조 등의 정신적 활동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전두엽 뇌 앞쪽 영역으로 인지 기능을 맡는다. 외부의 정보를 처리하고 판단하며 사물을 기억한다. 행동과 감정을 조절하고 대화능력을 담당한다. 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맡고 있다고 보면 된다.
두정엽 머리 뒤쪽 정수리에 위치하며 사물의 위치와 움직임을 인식하는 부위다. 신체에 명령을 내리고 촉각과 미각 등 오감을 관장한다. 공간인지능력도 두정엽이 맡는 분야다.
측두엽 머리 뒤쪽에서 귀 부근에 위치한다. 사물의 형태나 의미를 파악하고 청각정보를 처리한다. 말을 듣고 입으로 소리 내는 명령을 내리는 기관이다. 기억 저장에도 많은 역할을 한다.
후두엽 머리 뒤쪽에 위치하며 시각 정보를 처리한다.
소뇌 소뇌는 뇌간 뒤쪽에 붙어 있는 뇌로 뇌 전체의 10% 정도를 차지한다. 몸의 평형을 유지하고 공간운동을 조절하는 중추가 위치해 있다.
뇌간 뇌간은 온몸의 신경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뇌로 전달하는 통로다. 생명과 직결되는 부위로 모든 주요 감각계가 뇌간을 거쳐 대뇌로 전달되며 자율신경 중추가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뇌 노화의 잘못된 통념 뇌세포는 재생되지 않는다?
성인이 되면 새로운 뇌세포는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믿어왔다. 학창 시절 ‘뇌세포가 죽으니 머리 치지 말라’고 말한 것도 이런 믿음에 근거한다. 뇌세포가 한번 죽으면 복구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돼도 새로운 뇌세포가 만들어지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억 강화의 핵심 뇌 구조인 해마에서 뇌세포 생성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즉, 나이가 많아도 새로운 뇌세포를 만들어 기억력을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만약 뇌세포 생성을 더욱 활성화할 수 있게 된다면 퇴행성 뇌질환인 알츠하이머병도 정복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다.

시계 그림이 그려져 있는 퍼즐 조각
Part 2 뇌 노화에 의해 발생되는 질환 알츠하이머병
뇌가 늙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새로운 뇌세포가 생성돼도 파괴된 모든 뇌세포를 다시 만들어낼 순 없다. 뇌 노화로 발생되는 질환 중 대표적인 것이 알츠하이머병이다. 알츠하이머는 가장 흔한 퇴행성 뇌질환으로 기억력을 포함한 인지기능이 약해지는 병이다. 최근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다 언어기능과 판단력 등 인지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알츠하이머에 대한 정확한 발병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먼저 유전자 영향이다. 유전자 돌연변이인 ‘프리세닐린-1’과 ‘프리세닐린-2’는 초기 알츠하이머의 원인으로 꼽힌다. 이들은 알츠하이머병의 주요 특징인 파괴적인 플라크 생산을 돕는다.
실제로 초기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사람들 중 절반에서 프레세닐린-1이 발견된다. 아밀로이드 전구 단백질 변종인 ‘아밀로이드 전구 단백질 유전자’도 알츠하이머병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호르몬 변화는 기억력에 영향을 준다.
나이가 들면 여성은 에스트로겐 수치가, 남성은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떨어진다. 이는 노화와 관련된 기억 손상의 원인이 된다. 많은 여성들이 폐경기 때 기억장애를 경험하기도 한다. 혈관질환 악화도 알츠하이머와 관련 있다. 전문가들은 총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으면 수년 내 기억문제를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고콜레스테롤로 인한 혈관문제가 뇌 인지기능을 손상시키거나 뇌졸중, 알츠하이머 등 뇌기능장애 위험을 높이기 때문이다.
고혈압도 문제다. 고혈압은 뇌의 백색질 내 미세혈관을 손상시킨다. 실제로 고혈압이 있는 사람들은 정상혈압을 가진 동년배보다 백색질 손상이 더 진행돼 있다.
1. 뇌졸중알츠하이머병 다음으로 치매의 주요 원인은 뇌졸중이다. 뇌졸중은 뇌로 가는 혈액 공급이 중단될 때 발생한다. 뇌는 산소와 영양분을 운반하는 혈액 공급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일순간 뇌혈관이 좁아져 혈액 공급이 끊길 수 있다. 이러면 뇌세포가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 죽게 된다. 뇌졸중이 심할 경우 실신 등의 증상으로 나타나지만 증상이 없이 뇌졸중이 생길 수 있다. 이들의 경우 3년 내 치매 발병 위험이 일반인에 비해 2배나 높다. 뇌졸중은 뇌혈관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고혈압, 고콜레스테롤 등이 원인이다.
2. 파킨슨병파킨슨병은 뇌신경세포가 점점 사라져 손가락이나 손목관절이 떨리고 경직된 움직임을 보이는 신경계 퇴행성질환이다. 단추를 채우거나 식사를 하거나 글씨를 쓰는 일 등이 어려워진다. 발병 원인을 알지 못하며 완치법도 없다. 다만, 도파민 공급을 통해 증상을 완화시키는 약이 있다.
3. 뇌전증비정상적인 뇌의 전기 활동에 의해 발생한다. 발작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며 만성화된다. 대뇌의 신경세포가 갑작스럽게 과흥분해 발작증상으로 나타난다. 뇌전증은 뇌세포 기능 이상으로 발생하므로 뇌의 병리적 변화나 뇌 손상이 주요 위험요인이다.
조선일보

기억력 챔피언 추천 '뇌 건강 높이는 법' 4가지

버스정류장에서 갸우뚱하는 여성 뒷모습
뇌 건강을 촉진시켜 기억력을 높이려면 하루 30분 이상 운동하고 DHA가 풍부한 식품을 먹는 게 도움이 된다
나이가 들어 뇌세포가 노화될수록 기억력이 떨어진다. 때문에 노화 정도를 기억력 정도로 판단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억력을 높이려면 뇌가 건강해야 하는데, 뇌 건강을 높이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미국 기억력 대회 최다 챔피언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기억력이 좋은 사람으로 알려진 넬슨 델리가 추천한 뇌 건강 높이는 법(기억력 높이는 법) 4가지를 소개한다.
◇새로운 언어나 악기 배우기언어 퍼즐을 풀거나, 새로운 언어를 배우거나, 새로운 악기 연주법을 배우는 것은 뇌를 자극해 기억력을 높인다. 결국 기억력을 관장하는 뇌 속 '해마'를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다.
◇암기 대상과 이미지 함께 기억하기암기 대상에 흥미를 가지는 게 중요한데, 그러려면 암기 대상과 그것의 이미지를 함께 기억하는 게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의 이미지와 연관시켜 기억하는 것이다. 이미지가 엉뚱할수록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능성이 커진다. 기억해야 할 일을 쉽게 휴대폰 등에 기록하기보다 머릿속에 기억하는 연습을 하는 게 좋다.
◇하루 30분 이상 운동하기하루 30분 이상 운동을 하면 뇌세포를 더 활성화시킬 수 있고, 뇌로 가는 혈류의 순환도 촉진할 수 있다.
◇DHA 풍부한 음식 많이 먹기두뇌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는 것도 도움이 된다. DHA가 풍부한 식품은 뇌 건강을 유지하고 기억력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 DHA는 생선 중에는 연어, 송어, 참치에 많고 해조류에도 풍부하다. DHA가 풍부한 건강기능식품을 먹는 것도 좋다. 단, 건강기능식품을 섭취할 때는 깨끗한 환경에서 배양한 원료인지 따져봐야 한다.



헬스조선 

뇌 건강 망치는 식재료 3가지


밀가루
뇌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지나치게 정제한 백미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은 피하는 게 좋다
나이 들어도 건강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운동을 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 만큼 건강한 '뇌'를 위한 투자를 하는 사람은 드물다. 뇌 건강을 지키려면 스트레스 관리를 잘 하는 등 정신 건강에 쓰는 게 우선이지만, 동시에 뇌 건강을 악화하는 식재료들을 피해야 한다. 뇌 건강을 위해 되도록 삼가야 하는 식재료를 알아봤다.
◇과도한 동물성지방·트랜스지방동물성지방과 트랜스지방을 과도하게 섭취하면 뇌로 혈액을 공급하는 뇌혈관이 손상되면서 뇌가 충분한 혈액을 공급받지 못한다. 결국 뇌졸중, 치매 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동물성지방과 트랜스지방은 뇌의 식습관을 관장하는 조절 중추에 문제를 일으키도 한다. 이 둘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뇌가 과도한 칼로리 섭취에도 포만감을 느끼지 못해 과식, 폭식으로 이어지기 쉽다.
◇​​지나치게 정제한 백미·​밀가루과도하게 정제해서 섬유질은 사라지고 녹말만 남은 백미나 밀가루도 뇌에 안 좋다. 녹말만 남은 백미나 밀가루는 쉽게 분해·흡수돼 혈당을 급격히 올리는데, 혈당이 급격히 오르면 췌장에서 인슐린을 지나치게 많이 분비하게 된다. 그러면 인슐린 작용에 이상이 생겨 탄수화물을 충분히 섭취해도 포도당이 혈액에 제대로 흡수되지 않아 두뇌 활동 능력이 떨어진다.
◇설탕·사탕 등 과도한 당분한국인은 보통 탄수화물 비중이 높은 식단을 유지한다. 여기에 과도한 당분 섭취까지 더해지면 이런 물질이 중성지방으로 변환돼 뇌혈관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과도한 당분은 뇌의 식습관을 관장하는 조절 중추를 파괴하기도 한다.
헬스조선 

파리의 카페 ― 하나의 세계관

좁은 집에 사는 파리지앵들, 카페를 거실 응접실로 애용
대학·서점 많은 파리 남쪽엔 예술가 북적이는 유명 카페들
그곳 테이블 앉아 바깥 볼 때 카페도 파리도 나의 것이 돼

파리 시민 대부분은 호텔 방보다 조금 더 큰 아파트에 산다. 그래서 집에는 따로 서재나 손님을 접대할 공간이 없다. 자연스럽게 가까운 카페를 이용한다. 파리에만 카페 1만2000여 곳이 있다. 카페는 파리지앵들의 거실이자 응접실이다. 여기에 오면 냉난방이 제공된 환경에서 책을 읽고 글도 쓸 수 있다. 커피 한 잔은 사교의 매체이자 고독과 독서의 동반자다. 일반적으로 커피나 차, 디저트를 즐기는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간단한 식사를 위해서도 적합하다. 카페는 동네마다 있고 보통 온종일 영업한다. "내가 가고 싶을 때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내가 원하는 곳에서 먹는다"는 파리지앵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반영한다. 보통 자신만의 카페가 있고, 웨이터들은 단골손님들의 이름을 대부분 기억한다. 이곳의 서비스는 느리다. 하지만 여기서는 빨리 먹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잘 먹는 게 중요하다. 식사를 하다가 남은 와인을 마시기 위해서 치즈를 주문하고, 또 남은 치즈를 끝내기 위해서 와인을 더 주문한다.

역사적으로 보면 정치적·사회적으로 혼란했던 20세기 초반 파리에 카페가 번성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집회 허가를 받으려면 복잡하고 오래 걸렸다. 그래서 그런 절차가 필요 없는 카페에 사람들이 모이고 종종 토론이 이루어졌다. 정치와 철학이 논의되고 문학이 창작되었으며 예술적 아이디어와 영감의 발표 현장이 되었다. 이곳에서 레닌과 엥겔스가 더 좋은 세상을 꿈꾸었고, 카뮈가 '이방인'을 썼으며, 사르트르와 생텍쥐페리·헤밍웨이는 삶의 순간에 대한 생각을 글로 옮겼다. 이곳을 아지트 삼았던 작가들은 새로운 작품을 낼 출판사를 찾았고, 피카소와 세잔은 새로운 전시를 계획했다. 파리의 카페들은 수많은 문학에서 다루어졌고 회화 소재가 되었으며, 공연의 배경이 되었다. 이런 전통을 바탕으로 파리의 카페들은 전 세계 카페 문화의 근본을 만들었다.

파리의 유명한 카페들은 센강의 남쪽에 많다. "북쪽(La Rive Droite)은 소비하고 남쪽(La Rive Gauche)은 생각한다"는 표현처럼 남쪽에는 소르본대학을 비롯하여 많은 도서관과 서점이 있다. 그리고 그런 철학과 문학, 예술적 분위기의 중심에 카페 테이블이 있다. 이들에게 카페는 소비하는 곳이 아니고 생각하는 곳이다. 카페는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스스로 지식인이 될 권리를 추구하는 자들의 공간인 것이다. 여기에는 고뇌, 유머, 슬픔, 낭만, 유혹과 같은 인생의 언어들이 존재한다. 지금도 카페를 사랑하던 사람들의 에피소드와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카페는 저마다 고유의 인생을 가진 듯하다. 파리지앵들의 라이프가 바뀌듯 오늘날 카페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다. 유명 카페들은 현지인들 못지않게 관광객들로 붐빈다. 철학과 문학과 예술이 논의되는 과거의 모습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처럼 그 시절로 돌아가 그 분위기와 지성에 취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하지만 또 생각한다. 나는 과거에 간직했던 그런 지성과 꿈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가? 카페들의 풍경이 변한 것처럼 나 자신도 변하지는 않았는가?

어둠이 질 무렵 가로등이 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다른 도시의 가로등이 어둠을 밝히는 기능을 위해 설치되었다면, 파리의 가로등은 건물과 거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추기 위해서 섬세하게 배치되었다. 파리의 카페는 이 무렵에 가장 아름답다. 카페에는 빛이 많다. 인근 가로등과 카페의 노란 조명이 어울려 싱커페이션(syncopation)을 이룬다. 과연 '빛의 도시(La Ville Lumi�re)'답다. 파리는 세계에서 가장 사진이 많이 찍히는 도시다. 특유의 섹시함과 로맨틱한 분위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 풍경 중 하나가 길모퉁이마다 있는 빨간 채양의 카페들이다. 하지만 도시 경관 중에서 으뜸은 오히려 카페 안에 앉아서 바깥을 바라보는 것이다. 거리를 바라보면 멋쟁이 파리지앵들이 컨베이어 벨트처럼 연속으로 돌아간다. 정말 이 도시에서는 행인들도 아름다운 경관의 일부가 된다. 그들의 모습에서 문학과 감성, 패션과 트렌드 그리고 스토리를 읽는다. 그런 즐거움 속에서 어느 순간 나만의 세계로 몰입된다. 카페는 고객들로 붐비지만 이렇게 보내는 시간은 매우 개인적인 경험이다. 예술적 순간, 감각적 순간이 느껴지고 곧 철학적 사고로 이어진다.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파리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읽고 마음을 읽는 것이다. 이렇게 카페에 앉아 있으면 이 도시가 나에게 회답한다.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완전한 '내'가 된다. 카페는 하나의 세계관이고 나의 보헤미아다.

'이 순간만큼은 저 여인은 나의 것이다. 이 카페도 나의 것이다. 파리도 나의 것이다.'―헤밍웨이의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able Feast)' 중에서
조선일보

당뇨병 치료에 개인별 맞춤 치료 권장

최근 당뇨병 임상 진료 지침은 개인별 맞춤치료를 권고하고 있다. 상황을 고려한 개별화된 혈당 조절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다. 혈당 수치에 근거한 기계적 접근이 아닌, 환자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상황을 고려한 치료 전략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당뇨병 시작 전 단계에서 예방하고 관리당뇨병으로 진행되기 전 상태인 대사증후군 또는 당뇨병 전 단계의 시기에서 성공적인 관리를 통해 당뇨병 발생을 예방할 수 있다. 당뇨병 고위험군 시기에 운동, 식이조절을 통해 체중을 조절하거나, 소량의 약제를 선제적으로 사용하면 당뇨병 발생을 예방함은 물론 효과가 십여 년 이상 지속되었다는 연구 결과도 존재한다. 경희대병원 내분비내과 이상열 교수는 “현재 경희의료원을 비롯한 전국 주요 병원에서 ‘한국인 당뇨병 예방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여기에 참여하면 당뇨병 예방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당뇨병 예방을 위한 생활습관 개선은 필수
생활습관을 개선하면 당뇨병을 효과적으로 예방할 수 있다. 먼저 일정한 시간에 알맞은 양의 음식을 규칙적으로 먹고 지나치게 달거나 짠 음식, 기름진 음식은 피하는 것이 좋다. 이상열 교수는 “야채와 식이섬유가 풍부한 통곡물, 단백질이 풍부한 콩, 유제품, 해산물 섭취 위주의 식습관을 권장한다”며 “흔히 당뇨병에 특정 음식이 몸에 좋다라는 소문을 듣고 해당 음식만 섭취하는 경우도 존재하는데 오히려 필수 영양소가 결핍될 수 있기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꾸준한 운동습관도 당뇨병 예방에 도움된다. 주 3회, 30분 이상의 운동은 심폐기능과 근력, 면역력을 향상시켜 당뇨병을 비롯한 만성질환을 예방하는데 좋다. 다만 급하게 운동하거나 무리하다 보면 부상을 입을 수 있기에 본인의 체력에 알맞은 방법으로 꾸준히 할 수 있는 운동종목을 선택해야한다.
합병증까지 예상해서 관리하는 예방 의료시대가까운 미래에 유전체 등 기존에 널리 활용되지 못했던 개인의 특성을 통합적으로 고려한 당뇨병 치료가 가능해질 전망이다. 이상열 교수는 “개인별 맞춤치료를 통해 환자 개인에 가장 알맞은 약제를 선별하여 치료에 우선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자신에 취약한 합병증 발생 위험을 미리 예상하고 선제적으로 관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젊은 당뇨병 환자 합병증 가능성 높아… 매일 땀나게 운동하세요

당뇨병은 중장년층에게 주로 생기고, 30대처럼 비교적 젊은 환자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대한당뇨병학회 자료에 따르면 전체 당뇨병 환자의 3%가 30대며, 30대를 포함한 한국 성인의 13.7%(약 470만 명)은 당뇨병 환자다. 당뇨병 명의인 고경수 부원장(내분비내과 교수)을 만나 젊은 당뇨병의 심각성과 생활관리 수칙 등에 대해 들어봤다.
젊은층에서 당뇨병이 왜 생기는지 궁금합니다.당뇨병은 갑자기 생기는 병이 아닙니다. 50대에 당뇨병이 생기는 사람도 결국에는 20대, 30대, 40대의 생활습관이 원인으로 혈당조절 기능이 점점 망가지는 게 원인입니다. 성인 당뇨병은 유전적인 원인에 더해, 당뇨병이 잘 걸리는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으면 생깁니다. 유전적인 원인은 췌장이 남들보다 튼튼하지 않아, 인슐린 분비 기능이 떨어지는 거죠. 여기에 혈당지수가 과도하게 높은 음식을 즐겨 먹는 등 나쁜 습관이 있으면 인슐린이 혈당을 낮추기 위해 과도하게 분비됩니다. 췌장이 혹사당하는 거죠. 30대에 당뇨병이 생기는 사람은 그만큼 남들보다 몸의 혈당조절 기능을 혹사시켰다고 보면 됩니다.

비만, 운동부족, 과식, 불규칙한 생활 패턴 등이 혈당조절 기능을 혹사시킵니다. 최근 젊은 사람들을 보면 이런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젊은데도 당뇨병이 생기는 겁니다. 똑같은 행동을 해도 자신의 췌장 상태에 따라 당뇨병이 빨리 오기도 하는 거죠. 나쁜 습관을 모두 가지고 있어도 당뇨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극소수의 경우에 해당합니다. 개인의 췌장이 얼마나 튼튼하고, 앞으로 그 튼튼한 상태를 유지할지는 현재의 의술로 알기 어렵습니다. ‘나는 지금 비만이고, 운동도 하지 않지만 당뇨병이 아니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 당뇨병이란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젊은 당뇨병 환자는 중장년층 당뇨병 환자에 비해 더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당뇨병이 무서운 이유는 합병증 때문입니다. 높은 혈당이 오래 유지되면 혈관이 상하고, 혈액순환이 잘 안 됩니다. 이 때문에 실명에 이를 수 있는 당뇨망막병증, 발에 궤양이 생기는 당뇨병성족부병증, 신장 기능이 떨어지는 당뇨병성신부전증 등 각종 합병증이 생깁니다. 당뇨병합병증은 당뇨병을 오래 앓을수록 많이, 심하게 생깁니다. 나이 들어 당뇨병이 생긴 사람에 비해 젊은 당뇨병 환자는 당뇨병을 앓은 기간이 자연히 길어지고, 당뇨병합병증이 생길 확률도 높아집니다. 60~70대 환자는 보통 20년 정도 당뇨병을 가지고 살지만, 30대 환자는 40~50년씩 당뇨병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겁니다. 젊은 당뇨병 환자의 관리가 철저해야 하는 이유죠.

공복혈당이 126mg/dL 이상, 식후 2시간 혈당이 200mg/dL 이상이면 당뇨병으로 진단하고 정상인 사람은 공복혈당이 70~99mg/dL, 식후 2시간 혈당이 140mg/dL 미만입니다. 젊은 당뇨병 환자는 정상에 가깝게 혈당을 조절하는 걸 목표로 합니다. 나이가 많은 당뇨병 환자는 정상 혈당을 유지하기 상당히 어렵습니다. 하지만 젊은 당뇨병 환자는 약 복용 및 생활습관 조절을 잘 해주면 상당수가 정상 혈당을 유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상 혈당을 유지한다고 해서 당뇨병이 낫는 건 아닙니다. 당뇨병은 완치가 없고, 평생 관리하며 사는 질환입니다. 그러나 혈당이 계속 정상으로 유지되면 당뇨병이 있어도 큰 합병증이 생기지 않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중장년층 당뇨병 환자처럼 약물치료가 중요한가요?
약물치료는 나이와 상관없이 필수입니다. 혈당을 낮춰주는 약을 사용해야 기본적으로 혈당 조절이 가능하기 때문이죠. 중장년층 당뇨병 환자와 다른 점은 운동요법에 대한 효과가 크다는 겁니다. 스쿼트·플랭크 같은 운동을 나이가 많은 환자가 따라 하기 쉽지 않죠.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나이가 많으면 심장에 큰부담을 줘서도 안 되는 경우가 많고요. 하지만 젊은 환자는 의지만 있으면 운동도 곧잘 따라하고, 강도 높은 운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당뇨병 환자에게 운동은 무척 중요합니다. 운동을 할수록 혈당도 소비되고, 근육이 커질수록 인슐린 저항성이 개선되기 때문이죠. 물론 보디빌더처럼 지나치게 근육을 키울 필요는 없습니다.

근육을 일부러 많이 키우려면 단백질이나 탄수화물을 많이 섭취해야 하는데, 이게 당뇨병 환자에게 좋은 식습관은 아니거든요. 운동은 유산소는 매일, 근력운동은 1주일 2회 이상 하면 됩니다. 유산소운동을 할 때는 보통 1시간에 4km 정도를 걸으면 된다고 하는데요, 이게 사실 상당히 빨리 걸어야 합니다. 심장이 적당히 뛰고, 숨이 차야 유산소운동 효과가 있습니다.

운동 외에 어떤 생활습관이 도움이 되는지 알려주세요.젊은 당뇨병 환자는 합병증이 더 잘, 심하게 생길 수 있으므로 혈관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당뇨병합병증은 대부분 혈관과 관련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금주·금연은 필수입니다. ‘젊으니까 괜찮다’, ‘혈당에는 영향이 없으니 문제없다’고 생각하지만 술·담배는 혈관을 상하게 해요. 술·담배를 즐긴 젊은 당뇨병 환자는 그렇지 않는 사람이 비해 나중에 혈관이 망가지는 게 다릅니다.
젊은 당뇨병 환자들에게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습관은 나이가 든 뒤에 바꾸기 쉽지 않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물 한 잔 마시는 사람, 창문 열고 환기하는 사람 있듯이, 꾸준히 운동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는건 습관입니다. 30대는 충분히 습관을 바꿀 수 있는 나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가끔 아직 젊으니 약을 안 먹고 싶다고 버티는 분도 있어요. 하지만 약 먹어서 손해 보는건 없습니다. 혈당을 내리는 효과도 검증되었고, 안정성도 확실하니까요. 간혹 엉뚱한 식품 등으로 민간요법을 하려는 분도 있지만,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고 약만큼의 효과를 내지도 않습니다. 약은 초기부터 꼭 복용하고, 의료진을 신뢰하면서 당뇨병을 잘 관리하기 바랍니다.
조선일보

당뇨병 환자, 심장 갑자기 뛰면 '이것' 먹어야

65세 이상 당뇨병 환자나 당뇨병을 오래 앓고 있는 사람은 저혈당으로 인해 쇼크까지 올 수 있어 주의해야 한다. 저혈당은 혈당이 70mg/dl보다 낮은 상태로, 혈액 내 포도당이 부족해 뇌와 신경계에 이상이 생길 수 있다. 당뇨병 환자의 45%가 경험할 정도로 흔한 증상이지만, 국내 당뇨병 환자 10명 중 7명은 저혈당에 대해 잘 모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뇨병 환자가 저혈당을 겪는 이유는 식사량을 과도하게 줄이거나 당뇨병약을 오래 복용해 혈당이 충분히 채워지지 않는 것이 영향을 미친다. 특히 우리나라 당뇨병 환자들은 혈당이 높아지는 고혈당 관리에만 신경 쓰는 경향이 있어 상대적으로 저혈당 위험에 대해 간과하기 쉽다.
저혈당 상태가 되면 심장이 빠르게 뛰고 식은땀이 나며 기운이 빠진다. 불안하고 초조한 느낌이 들거나 손끝·발끝이 저리기도 한다. 바로 당을 채우지 못하면 저혈당 쇼크로 이어질 수 있다. 저혈당 쇼크는 뇌로 가야 할 포도당이 부족해 뇌 기능이 일시적으로 멈추면서 실신하는 증상이다. 심한 경우 혼수에 빠지거나 사망할 위험도 있다.
가벼운 정도의 저혈당이더라도 자주 반복되면 고혈당과 마찬가지로 심혈관 질환 발병 위험이 커진다. 저혈당 상태가 되면 우리 몸은 혈당을 올리는 교감 신경 호르몬을 분비하는데, 이 과정에서 교감 신경이 과도하게 긴장해 동맥을 좁게 만들어 혈류 부전이 일어날 수 있다. 경희대병원의 연구 결과, 저혈당을 경험한 당뇨병 환자는 경험하지 않은 당뇨병 환자보다 치매에 걸릴 위험이 3배 높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따라서 저혈당 증상이 나타나면 5분 이내로 사탕이나 과일주스 등을 먹어 당을 채워야 한다. 과일주스는 액체 상태라 몸 안에서 당 흡수가 빠르게 이뤄진다. 다만 초콜릿은 당분이 있긴 하지만 지질 성분이 많아 혈당을 올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비교적 효과가 작다.
저혈당을 예방하려면 당뇨병 환자는 끼니를 거르거나 식사량을 갑자기 줄이면 안 된다. 평소보다 신체활동이 많거나 당뇨병약 용량을 늘릴 때 갑작스러운 저혈당이 오기 쉽다. 항상 과일주스나 사탕 등을 챙겨 혈당을 올릴 수 있게 준비해야 한다
조선일보

당뇨병 환자의 70%는 심혈관 질환으로 망… 혈압·체중 관리 필수

당뇨병 심혈관계 합병증

관상동맥 수술, 일반인의 10배
금연·금주하고, 주 3회 운동해야 심혈관 질환 막는 당뇨병 약 도움


당뇨병을 7년째 앓고 있는 김모(46·서울 중구)씨는 몇 달 전부터 가슴 통증과 호흡곤란 증세를 느꼈다. 나이도 많지 않은 편이고, 꾸준히 혈당 관리를 하고 있어서 당뇨병 합병증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 통증과 호흡곤란 증세가 심해져서 병원을 찾았는데, 의사로부터 "아직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당뇨병으로 인한 심혈관계 합병증 위험이 높아져 있다"며 "혈당 관리뿐 아니라 심혈관계 질환 예방을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당뇨병 환자는 합병증으로 심혈관계 질환이 오지 않도록 관리를 철저히 해야
당뇨병 환자는 합병증으로 심혈관계 질환이 오지 않도록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 고혈압·이상지질혈증이 동반됐으면 정기적으로 혈중 지질 검사를 시행하고, 운동·식사 조절을 실천해야 한다.
당뇨병 환자 사망 원인 '심혈관계 질환'

당뇨병은 30세 이상 성인 7명 중 한 명이 앓고 있는 병으로, 국내 당뇨병 진료 환자는 꾸준히 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2010년 202만명에서 2015년 252만명으로 환자 수가 24.6% 증가했다. 우리나라에서 당뇨병으로 사망하는 사람은 연간 1만명에 달하는데, 이는 OECD 국가 중 7위에 해당한다. 당뇨병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당뇨병 합병증이 생기면 사망 위험이 높아진다. 당뇨병 합병증은 주로 당뇨망막병증, 당뇨발, 당뇨병성 신경병증이 꼽히는데, 정작 당뇨병 환자의 최대 70%가 심혈관계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혈당이 높으면 혈관이 점점 좁아지다가 결국엔 막히게 되고 협심증·심근경색 같은 심혈관계 질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영국의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60세를 기준으로 했을 때, 당뇨병 환자의 기대 수명과 일반인의 기대 수명은 6년 정도 차이가 난다. 당뇨병 환자 중에서도 심혈관계 질환을 갖고 있는 사람은 심혈관계 질환이 없는 당뇨병 환자보다 6년 덜 산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심혈관계 질환이 있는 당뇨병 환자는 건강한 사람에 비해 기대 수명이 12년이나 짧다는 얘기다.

당뇨병 환자, 심혈관계 질환 위험 4배

그렇다면 당뇨병 환자는 일반인에 비해 심혈관계 질환이 얼마나 잘 생길까? 여러 연구에 의해, 당뇨병 환자는 심혈관계 질환 발생 위험이 최대 4배로 높다는 게 밝혀졌다. 하지만 심혈관계 질환은 뇌졸중 등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증상이 거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환자가 관리에 소홀하다. 서울아산병원 내분비내과 이우제 교수는 "당뇨병 환자는 일반인에 비해 심혈관계 질환 발생 위험이 높아서 혈당 관리와 함께 심혈관계 위험 인자까지 종합적으로 관리해야 하지만, 철저한 관리가 잘 이뤄지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혈당과 함께 혈압이나 콜레스테롤 등을 모두 잘 관리하는 환자는 16%에 불과하다고 한다.

국내 한 대학병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심혈관계 증상이 없던 환자여도 당뇨병을 10년 이상 앓았을 경우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이 심혈관계 질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뇨병 환자가 심혈관계 질환 관련 수술을 받게 되는 비율도 높은 편이다. 당뇨병이 없는 사람과 비교해, 관상동맥이 막혀서 수술 받는 비율이 10배, 뇌졸중이나 협심증으로 수술받는 비율은 4배, 뇌출혈은 2배 이상으로 많다(대한당뇨병학회).

고위험군은 사전 검사하고, 藥 신중히 선택

이런 위험 때문에, 미국임상내분비학회는 당뇨병 환자의 심혈관계 질환 예방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대한당뇨병학회가 '당뇨병 관리 하나 둘 셋' 수칙을 제정했다. ▲혈당 관리를 철저히 하고 ▲고혈압·이상지질혈증 등을 관리하며 ▲심혈관계 질환을 비롯한 합병증 예방에 신경쓰자는 내용이다.

당뇨병 환자 절반은 고혈압, 이상지질혈증, 비만 등을 동반하고 있다. 이런 질환이 동반됐다면 심혈관계 질환 고위험군으로 봐야 한다. 심혈관계 위험도를 예측할 수 있는 혈중지질 검사를 정기적으로 받아야 하고, 혈당 관리와 함께 혈압·콜레스테롤 수치에도 신경써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생활습관을 개선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금연·금주를 실천하고, 식사는 짜지 않게 먹어야 한다. 걷기·자전거 타기·수영 같은 운동을 주 3회(총 150분 이상) 하는 것도 추천한다.

최근에는 당뇨병 약 중에서 심혈관계 질환 위험 감소 효과를 보인 치료제가 국내 최초로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허가를 받은 바 있다. 분당서울대병원 내분비내과 임수 교수는 "심혈관계 질환 고위험군에 해당하는 당뇨병 환자는 주치의와 상의해서 치료 전략을 잘 세워야 한다"며 "심혈관계 합병증 검사를 받고, 생활습관을 철저히 관리하며, 심혈관계 질환으로 인한 사망 위험을 낮출 수 있는 치료제를 복용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헬스조선

당뇨병, 눈 흐릿해지고 발 절단까지… 효과적 예방법은

식단관리와 꾸준한 운동 필수


혈당 측정기를 사용 중인 손
생활습관형 질병인 당뇨병은 식습관 개선, 운동으로 호전될 수 있다 
당뇨병은 전 세계인의 3억5000만 명,우리나라 전체인구의 약 400만 명이 앓고 있을 정도로 흔한 병이다. 혈중의 당분이 충분히 사용되지 못해 혈액에 쌓여 발생한다. 혈당 조절 호르몬인 인슐린를 분비하는 췌장에 이상이 생겨 인슐린 분비가 적어지는 게 원인인 '제1형 당뇨병', 인슐린은 제대로 분비되지만 체내에서 작용하지 못하는 '제2형 당뇨병'으로 나뉜다. 국내 전체 당뇨병 환자의 약 97%를 차지하는 것은 제 2형 당뇨병인데, 이는 '생활습관형 질병'이라 불릴 만큼 식습관, 운동 등 생활습관과 관련이 깊다. 제2형 당뇨병의 합병증과 관리법에 대해서 알아보자.
◇'당뇨' 증상 자체보다, 그로 인한 합병증이 더 심각공복 혈당(8시간 이상 공복 상태를 유지한 후 측정한 혈당)이 100mg/dL 이상, 125mg/dL 이하면 당뇨병 전단계, 공복 혈당이 126mg/dL 이상이면 당뇨병이다.
당뇨병의 대표적인 증상은 세포로 흡수되지 못한 당분이 소변을 통해 배출되는 '당뇨'이다. 당 배출을 위해 소변이 자주 마렵고 갈증이 심하다. 합병증도 심각하다. 대표적인 게 '당뇨병성 망막 변증'이다. 당뇨병성 망막병증은 혈액이 망막주변 미세한 혈관까지 이동하지 못해 시신경 혈액순환에 장애가 생기는 질병이다. 당뇨병 발병 15~20년 후 거의 모든 환자에게 나타난다. 시야가 흐려지고 시력이 떨어지다가 심해지면 실명에 이른다. 초기에는 증상이 거의 없고 자각하기 힘들어 방치하기 쉽기 때문에 정기적인 안과 검진이 필요하다. '당뇨발(당뇨병성 족부병증)'도 주의해야 한다. 당뇨병 환자의 15%가 겪는 합병증인 당뇨발은 혈액이 몸의 말단 부위인 발까지 잘 순환하지 못해 발에 염증, 궤양이 발생하는 질병이다. 작은 상처에도 궤양이 발생하고 심하면 괴사로 이어져 발을 절단해야 한다. 실제 당뇨발 환자의 70~80%가 다리를 절단한다. 당뇨병 환자는 발을 청결히 유지하고 통풍이 잘되게 하며, 작은 상처에도 반드시 의사의 진료를 받아야 한다.
이 외에도 피로감, 피부가려움 등이 나타나고, 때로 과도한 인슐인 투여로 인해 저혈당이 발생하기도 한다.
◇철저한 식단관리와 꾸준한 운동 필수당뇨병은 완치는 어렵지만, 잘 관리한다면 일반인처럼 건강한 생활할 수 있다. 특히 제2형 당뇨는 식사, 운동, 비만 등 생활습관의 영향을 크게 받으므로 엄격한 관리가 필요하다. 인슐린 분비 시간을 규칙적으로 하기 위해 매일 일정한 시간에 알맞은 양을 규칙적으로 먹어야 한다. 또 혈당을 빠르게 올리는 설탕, 과일과 같은 단순당의 섭취를 줄여야 한다. 당뇨병 환자에게서 흔히 동반되는 심혈관계질환을 예방하기 위해 지방의 섭취를 적절히 하고 버터, 육류 등의 동물성지방은 아보카도, 올리브유 등 식물성 기름으로 대체한다. 술과 담배는 피하는 것이 좋고 나트륨의 섭취를 제한하고 식이섬유를 충분히 섭취해 비만해지지 않도록 한다. 철저한 식습관 관리와 더불어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공복 시 운동은 저혈당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식후 30분~1시간 뒤에 운동하는게 좋다. 지방을 열원으로 사용하는 근력운동보다는 당을 사용하는 유산소 운동을 주 3~5일 30분 이상 하는 것이 좋다.
헬스조선

삶의 다섯 가지 중요한 질문

얼마 전 하버드대 교육대학원 제임스 라이언 학장의 'Wait, What?'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됐다. 2016년 그의 졸업식 축사 동영상이 소셜미디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바람에 출판사들의 구애가 쏟아졌단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들'이라는 주제의 연설에서 그는 졸업생들에게 아래와 같은 다섯 가지 질문을 하며 살아갈 것을 주문했다. 그가 권하는 첫 질문은 아이들에게 집안일이나 심부름을 시키면 곧바로 돌아오는 반문이다. "너, 오늘 저녁까지 네 방 말끔하게 청소해놔"라고 하면 대뜸 "잠깐만요, 뭐라고요?(Wait, What)"라고 구시렁거린다. 그는 이 반문이야말로 우리가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던져야 하는 물음이란다. 세상의 부조리를 파악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다음 질문은 "궁금해(I wonder)"로 시작한다. '왜 그런 건지?(I wonder why)' 혹은 '만일 이러면 어떨지?(I wonder if)' 궁금해하는 단계이다. 이어서 "적어도 우리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느냐?(Couldn't we at least)"라고 물어야 한단다. 그러곤 남들이 나설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먼저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나?(How can I help)" 묻자고 제안한다. 마지막 질문은 영화 '곡성'으로 유명해진 "뭣이 중헌디(What really matters?)"이다.
어쩌다 보니 또 한 학기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내게는 3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치고 다시 학자로 되돌아와 보낸 뜻깊은 학기였다. 학생들에게는 졸업이 코앞이거나 그리 멀지 않음을 일깨우는 순간이다. 방학을 맞이하며 라이언  학장이 권하는 이 다섯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자. 내 삶은 물론 이 세상을 좀 더 밝게 하려면 우선 확고한 문제의식이 있어야 한다. "잠깐, 뭐라고?" 그러곤 왜 그런 문제가 존재하는지 의아해하며 우리가 함께, 또는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물어야 한다. 그러면서 늘 자문해야 한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