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18일 금요일

백거이(白居易) 채시관(采詩官)

君耳唯聞堂上言 (군이유문당상언·임금의 귀는 오직 당상관의 말만 들을 뿐이고)
君眼不見門前事 (군안부견문전사·임금의 눈은 대궐 문 앞의 일도 보지 못한다)
貪吏害民無所忌 (탐리해민무소기·탐관오리들은 백성을 해침에 꺼리는 바가 없고)
奸臣蔽君無所畏 (간신폐군무소외·간악한 신하들은 임금을 가리고도 두려움이 없다)
君兮君兮願聽此 (군혜군혜원청차·임금이시여, 임금이시여, 이 말씀을 들어 보세요)
欲開壅蔽達人情 (욕개옹폐달인정·막히고 가린 것을 열고 백성의 마음에 이르려면)
先向歌詩求諷刺 (선향가시구풍자·먼저 백성의 노래와 시에서 풍자를 찾으십시오)
이 시는 시가의 사회적 효용을 주장하면서 임금에게 풍속을 살피는 관리를 뽑고, 이 관리로 하여금 노래 부르는 소리와 풍자하는 시를 아래에서 채집하여 위에 바치도록 하는 이른바 채시관 제도를 둘 것을 건의하고 있다. 정치란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니, 백성들은 그들의 어려움이나 불만 등을 밖으로 나타내기 마련이고 그것이 풍자나 동요 등으로 표출되고 있으니 이를 제대로 수집하여 해결해 주는 제도를 만들자는 취지의 시이다. 임금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시의 형식을 빌려 정책을 건의한 것도 지모가 있다.

백거이는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으로 29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40여 년을 관직에 있으면서 출세와 욕망의 절제, 출사와 은일을 두고 갈팡질팡하며 줄다리기를 했다. 그럼에도 그의 삶은 진정성이 있었고, 개인은 청렴하였으며, 정치는 자비로웠다고 한다. 또한 관직에 있으면서도 시대적 폐단을 지적하거나 왕에게 간하는 풍자시도 많이 썼다.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절절한 사랑을 노래한 ‘장한가(長恨歌)’ 등으로 널리 알려진 백거이는 젊은 시절에는 지적이고 낭만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다가 점차 현실을 알게 되자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며 풍자하는 쪽으로 옮겨 갔고, 노년에는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여 인생의 지혜를 표상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는 글은 누구나 알 수 있게 쉽게 써야 한다면서 시를 지을 때마다 글을 모르는 노인에게 읽어 주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면 바로 쉬운 표현으로 고쳤다고 한다.

백거이는 항주자사 시절 조과도림(鳥?道林) 선사를 찾아가 불법(佛法)의 근본 뜻 嫡嫡大意을 물어 ‘나쁜 짓은 하지 말고 좋은 일만 하라 (諸惡莫作 衆善奉行)’는 말을 듣고 ‘그거야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는 것 아니냐’고 아상을 내다가 ‘세 살 먹은 아이도 말할 수는 있지만 80세 노인도 실천하지는못한다 (三歲兒孩雖道得 八十老翁行不得)’는 말에 크게 한 방 맞은 후 발심하여 불교에 깊이 귀의했다.
김진태 전 검찰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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