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13일 토요일

넥타이 판매부터 시작한 정말 긴 여정, 이 모든 걸 해냈다는 게 정말 자랑스럽다… 하지만 난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다

랄프로렌 50주년, 랄프로렌 인터뷰

50주년 행사와 관련해 당신에 대한 많은 기사를 읽었다
'스트리트부터 클래식까지 모든 스타일의 제왕(king)' 이라는 평가였다
"내가 왕이다! 그래, 그걸로 됐다! 하하."

2018 Korea Blockchain Expo


랄프 로렌과 아내 리키, 그의 자녀들.
랄프 로렌과 아내 리키, 그의 자녀들.
회색 트랙슈트에 요즘 유행하는 청키한 느낌의 운동화. 거리를 누비며 스케이트 보드를 타거나 금방 힙합 문구라도 내뱉을 '요즘 청년'같은 모습이었다. 환하게 웃음 지으며 걸어오는 랄프 로렌에게서 79세란 나이를 곧바로 연결하긴 쉽지 않았다. 미국 뉴욕 매디슨 650번가에 있는 그의 사무실 크고 작은 테이블 위는 영화 '배트맨'의 주인공 배트맨과 '인크레더블'의 미스터 인크레더블, '캐리비안의 해적' 주인공 잭 스패로 등의 피규어로 잔뜩 장식돼 있었다. 소파에는 폴로랄프로렌 테디 베어 인형이 먼저 손님을 맞았다. 장난감 전시실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책상 위에도 수십개의 피규어가 빼곡히 놓여 있었다. "난 장난감을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는 랄프 로렌의 동그란 눈동자는 어린 시절 하굣길 쇼윈도에서 파란 스웨이드 슈즈를 바라보며 설레 하던 소년 랄프 로렌 그 자체였다. 푸른 빛이 서린 짙은 회갈색 눈동자의 그 소년을 현재로 끌어오자 어느새 그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50주년이 당신에게 무얼 의미하는가.

랄프 로렌의 어린 시절.
랄프 로렌의 어린 시절.
"넥타이 판매에서부터 시작해서 남성복, 여성복, 아동복, 홈컬렉션에 레스토랑까지 정말 긴 여정이었다. 이 모든 걸 해냈다는 게 정말 자랑스럽다. 내가 믿는 모든 것을 해왔고, 완벽한 성취다. 하지만 난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다!"

―당신을 이 자리까지 이끈 원동력은 무엇인가.

"내 자신에 대한, 내가 사랑하는 것에 대한 열정이다. 난 내가 무얼 원하고 하고 싶은지, 내 감정에 대해 항상 솔직하게 표현해왔다. 넥타이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고, 이를 또 상품으로 반영하면서 점점 나의 삶이 확장됐다. 모든 것에 대한 가능성이 나를 현재로 이끌었다."

―패션은 정말 경쟁이 치열한 전쟁터다. 적들이 항상 도사리는.

"적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난 상대에게 오리지널리티가 있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알며, 그들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면 정말 존중한다. 물론 옳은 길을 가지 않는다면 다른 얘기지만. 난 정말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존중한다."

―쉴새 없이 일한다. 워커홀릭인가.

"전혀. 삶을 사랑하고, 장난감을 좋아하고, 즐겁게 살고 있는 것뿐이다. 패션은 우리가 무얼 하고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반영이다. 난 장난감을 사랑한다. 말론 브랜도같이 핸섬하고 멋진 역할과 캐릭터를 좋아한다. 영화를 보는 건 마치 꿈에서도 본 적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창문이 눈앞에서 열리는 것 같았다. 말 위에 앉은 주인공이 존 웨인이 아니라 나이고, 영화 속 홈런 타자가 바로 나인 것이다. 내 디자인은 내가 그간 꿈꿔왔던 것처럼 사람들이 꿈꾸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나온다. 배트맨을 보라! 내가 배트맨이다. 내가 바로 브루스 웨인이다. 핸섬하고 쿨하지 않은가? 하하"

―랄프 로렌 매장을 처음 열었을 때 기분은 어땠나.

랄프 로렌과 아내 리키의 단란한 시절.
랄프 로렌과 아내 리키의 단란한 시절.
"맨해튼 이스트애비뉴 72번가를 말하는 건가? 오랜 기간 내가 꿈꿔왔던 일이었다. 클래식함이 넘치면서도 영원성(타임리스)을 담고 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일이 흥미진진하고 스릴 넘친다. 우리를 특별한 공간으로 이끌어내 삶에 변화를 주는 장소와 사물을 사랑한다. 영화, 차, 콜 포터의 가사,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가 선사하는 낭만을 사랑한다. 그 모든 것에는 공통점이 있다. 시간도 나이도 없다는 것이다."

미국 성조기를 입은 리키와 청바지를 즐기는 랄프 로렌.
미국 성조기를 입은 리키와 청바지를 즐기는 랄프 로렌.
―처음 패션계에 발을 들였을 때 디자이너나 사업가가 되는 게 꿈이었나. 지금 돌아보니 그 꿈을 모두 이뤘다고 생각하는가.

"50년간 매일이 시작이고 또 변화였다. 세상이 항상 똑같을 수만은 없다. 하지만 브랜드에 내 이름이 더해지고, 사람들이 내 옷에서부터 인테리어, 레스토랑까지 즐기는 걸 보면서 패션과는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을 느낀다. 회사란 건 비전과, 목소리를 담고 자신만의 철학과 식견이 있어야 한다. 만약 허울 좋게 허위로 무언가를 꾸민다면 그 회사는 이상과 현실의 충돌로 고생할 수밖에 없다."

―지금껏 가장 기억에 남고 의미 있는 순간은 언제였나?

"아마도, 50주년 기념 패션쇼의 밤? 내가 정말 꿈꿨던 순간이고 바라왔던 것들이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멋진 옷차림과 그들의 웃음…. 당신도 참석했다고 들었는데, 현장에 있어보니 어땠는가?"

―정말 대단한 광경이었다. 그날 당신과 함께 사진도 찍었는데. 여기 휴대폰에 담겼다.

"멋진 장면이군! 당신 옆에 있는 내 모습이 굉장히 멋지고 꽤 좋아 보인다. 하하"

―타임머신이 있다면 언제로 되돌아 가보고 싶은가. 영화 '백투더퓨처'처럼 말이다.

"글쎄. 가장 잘 생겨 보이는 때로? 하하. 난 언제나 젊고, 건강하고, 에너지 넘친다. 뒤돌아보지 않는다. 앞을 바라본다. 전진하면서 더 많이 이루고자 해왔다."

―후회한 적은 없는가? 어떻게 앞만 보고 전진하는 게 가능한가. 미래는 불분명한데.

"후회란 건, 물론 몇번 있었겠지만 지금은 다 좋다. 미래는 결코 명확할 수가 없다. 전혀 알 수 없는 게 미래이기 때문에 네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과거를 걱정하고 그 과거 속을 달리는 게 아니라 지금에 집중하고 내 앞에 무엇이 있는가 발을 디뎌야 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꿈이 있어도 실현되기 쉬운 환경이 아니다. 좌절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경제 불안 요인도 많다.

랄프 로렌
희귀 자동차 수집 취미가 있는 랄프 로렌이 자신의 자동차 앞에 섰다. / 랄프 로렌 제공
"누구에게나 삶이란 힘든 부분이 있다. 회사에 못 들어갈 수도 있고, 들어간들 기분 좋지 않는 상황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면 굳건하게 자신을 지켜내야 한다. 스스로를 더 믿어라. 재능이 있다면 꼭 그 재능을 발휘할 공간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난 부유하게 태어나지도 않았고, 무일푼에서 시작했다. 무엇도 당연하게 주어지는 게 없었다."

―많은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타이밍, 운, 결단력 등 여러 가지 요소를 말한다.

"타이밍, 운 이런 것들도 모두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네가 타이밍을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나아갈지 네가 길을 만들어야 한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기회가 오는 것도 알아챌 수 있다. 넥타이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을 때 난 아이디어가 있었고, 때를 기다렸다."

―모범적인 가정으로도 유명하다. 유명인들의 가정이 모두 건강한 건 아니다.

"물론 삶이 항상 쉬운 건 아니다.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중요한 건 부모님이 우리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나에게 부모님은 인생의 롤 모델이자 멘토였다. 그들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고, 나도 아내 리키와 아이들을 키우면서 자녀가 자유롭게 커 나갈 터전을 만들어주려 애썼다. 자녀들은 부모 자신의 표현이며 부모들의 꿈이다."

―지금껏 가장 기억에 남는 칭찬은 무언가.

"난 내가 항상 누구인가 생각하며 살았다. 사람들을 존중했고, 그들도 나를 존중하며 좋은 이야기들을 해줬다. 무언가 좋은 걸 하면 당신에게 항상 좋은 게 돌아오게 된다."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주문(mantra) 같은 게 있다면. 아침에 일어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 있다면?

"맨트라는 없다. 하지만 아침에 거울 속 나를 본다면…. 좀 더 멋져 보이고 싶군! 낮에 내 모습은 꽤 괜찮다. 하하."

―당신의 60주년은 어떨 것 같은가.

"그때도 정말 핸섬했으면 좋겠다. 쿨하고 싶다."

―50주년 행사 때 당신은 청바지를 입었는데. (이날 드레스코드는 '블랙타이(턱시도)'였다.)

"단순한 턱시도 슈트 보다는 턱시도 재킷에 진, 부츠 같은 걸 입는 게 더 드레시해보인다고 생각해왔다. 오래전부터 시도해왔고,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그 모습을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떤가 그날 나 멋지지 않았는가? 물론 다음번엔 또 다른 방식으로 시도할 수 있을 것 같다."

―50주년 행사와 관련해 당신에 대한 많은 기사를 읽었다. 'RL93' 등 90년대 당신이 내놓았리트 웨어의 상징이었다. 당신은 스트리트 의류의 선구자로 꼽힌다. 슈프림의 제비아 CEO 역시 당신을 존경하고 추종했으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가리키는 '로 라이프(Lo life)'란 단어도 생겼다. '스트리트부터 클래식까지 모든 스타일의 제왕(king)'이라는 평가였다.

"내가 왕이다! 그래, 그걸로 됐다! 하하."


'아메리칸 드림'이란 건 바로 이것이었다. 랄프 로렌 창립 50주년 기념 패션쇼가 열린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 한복판 베데스다 테라스. 턱시도와 드레스 차림의 유명인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채웠다. 랄프 로렌의 오랜 친구이자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영화배우 로버트 드니로, 앤 해서웨이, 피어스 브로스넌, 제시카 채스테인, 그래미상 수상자인 가수 카녜 웨스트, 챈스 더 래퍼, 셰릴 크로우, 브루스 스프링스틴, 요리연구가이자 방송인 마사 스튜어트와 디자이너 마이클 코어스, 캐롤리나 헤레라, 캘빈 클라인, 다이앤 폰 퍼스텐버그…. 하늘색 드레스로 멋을 낸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까지. 영화 촬영장인지 레드카펫인지 패션쇼장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랄프 로렌은 "깊이 있게 나만의 것을 표현하면서 항상 믿어 왔던 영원하고, 나만의 고유하며 정통적인 스타일의 런웨이를 창조하고 공유하고 싶었다"며 "나에게 너무 특별한 공간인 뉴욕 센트럴 파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뉴욕 브롱크스에서 자란 랄프 로렌에게 센트럴 파크는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며, 그가 그 한복판에서 자신의 역사가 담긴 쇼를 한다는 건 그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50년을 걸어왔는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현장이었을 것이다.
‘랄프로렌 창립 50주년 패션쇼’
지난 9월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열린 ‘랄프로렌 창립 50주년 패션쇼’에 턱시도 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등장한 디자이너 랄프 로렌. 언제나 ‘청년’ 같은 그의 스타일이 돋보인다.
‘랄프로렌 창립 50주년 패션쇼’
뉴욕 랄프 로렌 창립 50주년 패션쇼에 나선 모델들. 랄프 로렌이 추구하는 미국 서부 스타일과 고급스러운 미국 상류층 패션이 섞인 의상으로 패션계를 열광케 했다.
궁전 같은 느낌의 패션쇼 장은 전세계에서 날아온 유명인들 500여명으로 어느덧 가득 찼다. 그의 최신 여성 컬렉션과 함께 폴로 랄프 로렌, RRL을 한 무대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브랜드 초창기에 함께했던 모델부터 최근의 인기 스타모델인 지지 하디드, 어린이와 개들까지 세대와 인종, 나이를 아우르는 150여명이 런웨이를 뜨겁게 달궜다. 마치 심장박동처럼 '랄프 로렌'을 외치는 배경 음악이 잦아들고,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모델들의 박수를 받으며 멀리서 계단을 내려오는 랄프 로렌에게 카메라 플래시가 비쳤다. 무대를 걸어오며 현장에 모인 이들과 악수를 나누고 포옹하는 모습의 랄프 로렌을 보며 눈물짓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카메라 불빛이 랄프 로렌을 빛나게 했다. 그의 눈가에 눈시울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환호의 목소리와 박수는 더욱 커졌다.

2018 Korea Blockchain Expo
이날의 절정은 두 번 있었다. 랄프 로렌의 눈물과 오프라 윈프리의 축사. "이날 확인한 건 패션 그 자체를 넘어서 살아있는 전설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바꿔놓을 수 있는가의 얘기였다. 인간적인 매력으로 존경을 표하며 한걸음에 달려온 많은 이들. 아주 특별한 패션의 반세기가 우리와 함께 있었다. 넓은 넥타이를 만들자는 그의 생각은 대형 회사로 커 나가게 했고, 그의 행보는 단순히 패션이 아니라 미국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다"로 시작하는 윈프리의 이야기는 '랄프 로렌'이란 '아메리칸 드림'을 그대로 보여줬다.

"내가 시카고로 이사 한 뒤 렌트비나 각종 공과금 같은 것도 충분히 내고도 남을 만큼 돈을 벌었다. 그때 난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나를 기념하기 위한 선물로 오랜 기간 생각해왔던 것고급 차나 보석이 아니었다. 바로 랄프로렌 수건이었다. 랄프 로렌, 당신은 패션만을 이야기한 게 아니다. 우리의 꿈을 디자인해왔다. 당신의 지난 50년간은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당신은 가정, 자유, 진실성에 집중했고, 이 모든 것을 이루어 눈으로 보여줬다. 항상 시의적절했으며 세월에도 변치 않는 영원성을 가졌다. 항상 눈부신 당신을 위하여 건배!"



조선일보

2018년 8월 24일 금요일

멀리 봐야 한다, 자주 올려다봐야 한다

'조망 효과' 경험하면 인생관 바뀌어
스마트폰에 빠져 삶 허비할 때 아니야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김정운 문화심리학자·나름 화가
요즘은 해가 저녁 늦게, 그리고 오래 떨어져서 참 좋다. 화실로 가는 길에 석양을 마주하며 듣는 클래식FM의 음악도 기막히다. 슈베르트의 가곡 '저녁노을(Abendrot)'이 흘러나온다. 테너 프리츠 분더리히의 노래가 최고다. 바리톤의 저음은 저녁노을의 '경외감'을 전달하기에 너무 무겁다. 소프라노는 반대로 너무 들떠 있다. 슈베르트 가곡은 피아노의 선율을 함께 느껴야 한다. 피아노가 스스로 노래하기 때문이다. 목소리와 피아노가 서로 다른 노래를 하는 것 같지만 묘하게 어울리며 흘러간다.

여수 여자만(汝自) 갯벌 저편으로 천천히 떨어지는 저녁노을에 그저 하염없이 앉아 있다. 최백호의 노래 '부산에 가면'도 하염없이 앉아 듣기에 참 좋다. 피아노의 멜로디와 가수의 노래가 제각기 진행되는 에코브리지의 작곡이 참으로 빛난다. 피아노의 반복되는 리듬에 중독될 즈음이면 최백호가 노래하는 가사가 비로소 귀에 들어온다.

'어디로 가야 하나, …오래된 바다만, 오래된 우리만….' 최백호의 목소리는 연신 떨린다. 이쯤 되면 최백호와 프리츠 분더리히는 동급이다.

여수도 이제 노래 바꿀 때가 됐다. 그동안 '여수 밤바다'를 너무 많이 틀었다. 주말 밤이면 아저씨까지 술 취해서 떼로 몰려다니며 '여수 밤바다'를 불러댄다. 가사도 딱 '여수 밤바다'까지만이다. 나머지는 죄다 '라라라' 경음악이다. 듣는 내가 더 답답하다.

'하염없음'은 시간이 정지되고, 유체 이탈처럼 '또 다른 나'가 공중 부양하며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경험이다. 철학적 '자기 성찰'이란 심리학적으로는 '경외감'과 '하염없음'으로 야기되는 '인지적 전환(cognitive shift)'이다.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이 엄청난 대자연 앞에서 내가 갖고 있는 현재의 인지 체계로는 그 어떠한 설명과 해석도 불가능하다. 남은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내 인지 체계를 통째로 바꾸는 일이다. 인간의 모든 미학적(美學的) 경험은 이 같은 '인지적 전환'과 깊이 관계되어 있다.
'올려다봐야 나를 본다'
'올려다봐야 나를 본다' /그림=김정운
우주선을 타고 먼 우주에서 처음 지구를 바라본 우주비행사들은 지구에 귀환한 후 인생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관점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를 가리켜 미국의 작가 프랭크 화이트는 '조망 효과(Overview Effect)'라고 했다. 건축가이자 디자이너 찰스 임스와 레이 임스 부부가 만든 '10의 제곱수(Powers of Ten)'라는 9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보면 우주비행사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화면의 관점은 공원에 앉아 있는 남녀 한 쌍을 1m 위에서 바라보는 장면에서 시작해서 매초마다 10배씩 높아진다. 채 몇 분이 되지 않아 지구가 속한 은하계마저 하나의 점이 되어버린다. 오늘날 '구글 어스(Google Earth)'라는 웹브라우저를 통해 누구나 '조망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인간이 세상을 보는 기준은 항상 자기 몸이다. 어릴 적 그렇게 컸던 학교 운동장이 나이가 들어 찾아가보면 그렇게 작을 수가 없다. 그 넓었던 집 앞 '신작로'가 그렇게 좁을 수가 없다. 내 몸을 기준으로 보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의 작은 몸으로 본 세상은 크고 놀라웠다. 호기심에 가득 차 세상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성인의 몸을 기준으로 보면 죄다 시시하고, 볼품없다.

지금 내 삶이 지루하고 형편없이 느껴진다면, 지금의 내 관점을 기준으로 하는 인지 체계가 그 시효를 다했다는 뜻이다. 내 삶에 그 어떤 감탄도 없이, 그저 한탄만 나온다면 내 관점을 아주 긴급하게 상대화시킬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멀리 봐야 한다. 자주 올려다봐야 한다. '저녁노을 앞에서의 하염없음'과 같은 공간적 오리엔테이션의 변화는 긍정적인 심리적 변화를 동반한다. 미국 텍사스 대학의 심리학자 프레드 프레빅은 인간과 동물의 결정적 차이는 '도파민으로 활성화되는 뇌(Dopaminergic Mind)'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도파민은 주로 '먼 공간'이나 '높은 공간'과 같은 '개인 외적 공간(Extrapersonal Space)'과 관계하는 반면, 세로토닌과 노르에피네프린과 같은 호르몬은 손이 닿는 '주변 사람 공간(Peripersonal Space)'과 관계한다. 도파민으로 활성화되는 '개인 외적 공간'의 분석 능력이 인간 문명을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구체적 맥락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의 추상적 사고와 창조적 문제 해결 능력은 '먼 곳', '높은 곳'을 조망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복잡한 문제가 생기면 눈을 위로 치켜뜨며 생각하는 거다. 지금 '25×9'를 암산해보라. 계산하며 당신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저절로 위를 보게 된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 내 시선은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주 먼 곳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서양의 성당이나 왕궁의 천장이 그렇게 높은 이유도 마찬가지다. 건물에 들어서면 저절로 위를 올려다보게 된다. 이때 느끼는 경외감을 통해 자발적인 '인지적 전환'을 유도하기 위해서다. 인간만 올려다본다!

자주 까먹고, 물건을 손에서 놓치고, 물을 쏟고, 오가며 문짝에 자꾸 부딪힌다고 불평할 일이 아니다. 가까운 것들에 대해 둔해지는 만큼, 멀고 높은 곳을 바라보는 거시적 안목과 탈맥락적 시선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전에는 안 머리 처박고 분노하고 한탄하며 내 한 번뿐인 삶을 허비할 때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시간 날 때마다 멀리 봐야 한다. 올려다봐야 한다. 그래야 제한된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창조적 통찰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여수 여자만의 저녁 해가 오늘도 그토록 장엄하게 지는 거다.


다자필무 (多者必無)

바쁜 일상 속에서도 평온을 꿈꾼다. 일에 파묻혀 살아도 단출한 생활을 그리워한다. 명나라 팽여양(彭汝讓)의 '목궤용담(木几冗談)'을 읽었다.

"책상 앞에서 창을 반쯤 여니, 고상한 흥취와 한가로운 생각에 천지는 어찌 이다지도 아득한가? 맑은 새벽에 단정히 일어나서는 대낮에는 베개를 높이 베고 자니, 마음속이 어찌 이렇듯이 깨끗한가(半窗一几, 遠興閑思, 天地何其寥闊也. 淸晨端起, 亭午高眠, 胸襟何其洗滌也)?" 새벽 창을 여니 청신한 기운이 밀려든다. 생각은 끝없고 천지는 가없다. 낮에는 잠깐 눈을 붙여 원기를 충전한다. 마음속에 찌꺼기가 하나도 없다.

"몹시 조급한 사람은 반드시 침착하고 굳센 식견이 없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대개 우뚝한 견해가 없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틀림없이 강개한 절개가 없다. 말이 많은 사람은 늘상 실다운 마음이 없다. 용력이 많은 사람은 대부분 문학의 아취가 없다(多躁者必無沈毅之識, 多畏者必無踔越之見, 多欲者必無慷慨之節, 多言者必無質實之心, 多勇者必無文學之雅)." 어느 한 부분이 지나치면 갖춰야 할 것이 사라진다. 급한 성질이 침착함을 앗아가고, 두려움은 과단성을 빼앗아버린다. 다변은 마음을 허황하게 만든다. 힘만 믿고 날뛰면 사람이 천박해진다.
"지나치게 부귀하면 교만해져서 도리에 어긋나기가 쉽다. 너무 가난하거나 천하면 움츠러들기 쉽다. 환난을 지나치게 겪으면 두려워하기가 쉽다. 사람을 너무 많이 상대하면 수단을 부리기가 쉽다. 사귀는 벗이 너무 많으면 들떠서 경박해지기가 쉽다. 말이 너무 많으면 실수하기가 쉽다. 책을 지나치게 많이 읽으면 감개하기가 쉽다(多富貴則易驕淫, 多貧賤則易局促, 多患難則易恐懼, 多酬應則易機械, 多交遊則易浮泛, 多言語則易差失, 多讀書則易感慨)

많아 좋을 것이 없다. 지나친 부귀는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고, 견디기 힘든 빈천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한다. 환난도 지나치면 사람을 망가뜨린다. 종일 이 일 저 일로 번다하고, 날마다 이 사람 저 사람과 만나 일 만들고 떠들어대면 사람이 붕 떠서 껍데기만 남는다. 말을 많이 하다 보면 꼭 실수를 하게 되어 있다. 무턱대고 읽는 책은 읽지 않느니만 못하다.
조선일보

2018년 8월 18일 토요일

당뇨·고혈압 동시에 오기 쉬워 … 혈관 차례로 망가져 합병증 심각

질병은 도미노처럼 진행된다. 한 가지 질환이 또 다른 질환을 부르고, 증상을 부추기며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고혈압과 당뇨병이 좋은 예다. 두 질환은 명의도 명약도 없다. ‘생활습관병’이기 때문이다. 음식 조절 실패, 흡연과 과음, 운동 부족 등 잘못된 생활습관이 병을 만들고 키운다. 당뇨병과 고혈압 극복은 ‘2인3각’ 경기와 같다. 의사와 환자가 한 몸이 돼 나쁜 생활습관을 고치고 초기 증상에 대응해야 한다. 병원은 최신 치료 지침을 제공하고, 생활습관을 점검하며, 맞춤 처방을 한다. 최근 주민 밀착형 진료로 지역사회의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고대안산병원 진료팀에 생활습관병의 대표적인 질환인 ‘당뇨병·고혈압 함께 극복하기’ 전략을 들었다.




-당뇨병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고혈압이 생기나.

 “그럴 가능성이 크다. 현재 65세 이상 노인 인구 절반이 당뇨병을 겪고 있고, 당뇨병 환자 중 60~70%가 고혈압 환자다. 당뇨 환자는 인슐린 저항성이 큰데 이것이 교감신경계를 강하게 자극해 혈관을 수축시킨다. 심장에서 내보내는 혈액량도 증가시켜 혈압을 높인다. 반대로 고혈압이 있는 사람도 당뇨병에 걸릴 위험이 크다. 고혈압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비만과 운동부족이다. 이 역시 혈당을 상승시켜 당뇨병을 일으킨다. 결국 고지방·고염분식·운동부족·흡연을 하는 사람은 고혈압이나 당뇨병이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발병 시기가 다를 뿐이다.”

-당뇨병과 고혈압이 함께 있으면 사망률이 더 높은가.

 “그렇다. 두 가지 질환을 동시에 갖고 있으면 혈관 파괴에 엄청난 가속도가 붙는다. 심장 주변 큰 혈관부터 망가지기 시작해 발과 손·눈 등의 미세혈관을 파괴시켜 각종 합병증을 일으킨다. 신장이 망가지고 발을 자르거나 실명하게 되는 심각한 합병증이 생긴다. 심근경색 등 혈관질환으로 갑자기 사망할 수도 있다. 원래 고혈압 치료 기준 혈압은 140~90㎜Hg이지만 당뇨병이 같이 있으면 130~80㎜Hg를 기준으로 삼아 치료해야 한다.”

-약의 선택도 중요하다. 여러 가지 성분이 하나로 된 약이 좋은가, 각각 따로 먹는 게 좋은가.

 “기존 혈압 약은 혈관을 직접 확장시키는 성분, 혈관을 수축시키는 호르몬을 억제하는 성분, 이뇨작용을 하는 성분 등 메커니즘이 다양하다. 따라서 약을 따로 먹어야 했다. 최근에는 이런 여러 성분을 한 알로 복용할 수 있는 복합제가 출시됐다. 효능의 차이는 거의 없다. 단 약물을 여러 개 먹어야 하는 부담을 줄여 환자가 약을 먹는 데 지치지 않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작용 성분 각각의 용량을 미세하게 조절하기 어려운 단점도 있다.”

-약은 가능한 한 나중에 먹는 게 낫나.

 “최근 당뇨병 초기부터 약물을 복용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연구결과가 발표되고 있다. 처음부터 약을 적극적으로 복용했을 때 췌장에 아직 남아 있는 인슐린 분비 기능을 활성화시켜 당뇨병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하는 데 중요한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또 심근경색·뇌졸중·뇌혈관질환 등 당뇨 합병증으로 인한 사망률도 줄여준다고 한다. 혈압은 기준선을 넘지 않으면 생활습관 개선을 통한 치료가 우선이지만 기준선을 넘으면 높은 혈압이 혈관을 망가뜨려 합병증이 심각해지므로 반드시 약물 복용과 함께 식사요법을 해야 한다.”

-합병증이 초기부터 나타날 수 있나.

 “병이 진행돼서야 합병증이 나타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당뇨병 진단을 처음 받은 사람의 50% 이상에서 이미 한 가지 이상 합병증이 있다. 당뇨병이든 당뇨병 바로 전 단계든 높은 혈당이 흐르면서 혈관을 손상시키므로 진단 초기부터 합병증이 나타날 수 있다. 초기 당뇨병 환자도 관리를 엉망으로 하면 몇 개월 만에 합병증으로 사망할 수 있다. 고혈압도 마찬가지다. 고혈압 초기에도 갑자기 큰 혈관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오면 혈관을 막아 급사할 수 있다. 당뇨병이든 고혈압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꾸준한 관리를 해야 한다. 한 순간 방심이 바로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중앙일보

2018년 1월 28일 일요일

Greensleeves 푸른 옷소매

Alas, my love, you do me wrong,
To cast me off discourteously.
For I have loved you well and long,
Delighting in your company.


아아, 내 사랑이여 나를 이렇게도 무참하게 버리다니
그대를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하였건만, 
그대와 함께 있는것이 그토록이나 기뻤건만.

Chorus:
Greensleeves was all my joy
Greensleeves was my delight,
Greensleeves was my heart of gold,
And who but my lady greensleeves.


초록색 옷소매는 나의 기쁨, 즐거움이었거늘.  
초록색 옷소매는 내 순정, 오직 나만의 연인이었거늘.

Your vows you've broken, like my heart,
Oh, why did you so enrapture me?
Now I remain in a world apart
But my heart remains in captivity.

당신은 약속을 깨뜨려, 내 가슴도 무너졌다네.
 오, 어찌하여 그대는 나를 사로잡았는가?
나는 무너진 세상에 남겨졌지만 
내 심장은 아직도 포로로 잡혀있다네

chorus

I have been ready at your hand,
To grant whatever you would crave,
I have both wagered life and land,
Your love and good-will for to have.


늘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 해주기 위해 당신의 곁을 지켰거늘
당신의 사랑과 호의를 갖기 위해 내 목숨과 영토를 모두 걸었거늘

chorus

If you intend thus to disdain,
It does the more enrapture me,
And even so, I still remain
A lover in captivity.


당신이 나를 물리칠수록 나는 더욱이나 당신에게 빠져드네, 
나는 여전히 당신의 포로라네

chorus

My men were clothed all in green,
And they did ever wait on thee;
All this was gallant to be seen,
And yet thou wouldst not love me.


나의 기사들도 당신의 시중을 들기 위해 모두 
초록색 옷을 입었는데 이토록이나 늠름하여도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네

chorus

Thou couldst desire no earthly thing,
but still thou hadst it readily.
Thy music still to play and sing;
And yet thou wouldst not love me.


그대는 속세의 재물에 관심이 없으나 
당신이 원한다면 모두 당신것
당신은 여전히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지만,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네


chorus

Well, I will pray to God on high,
that thou my constancy mayst see,
And that yet once before I die,
Thou wilt vouchsafe to love me.


신께 기도드리오니 내가 눈을 감기전에 
그대가 나를 사랑하게 되기를


chorus

Ah, Greensleeves, now farewell, adieu,
To God I pray to prosper thee,
For I am still thy lover true,
Come once again and love me.


아, 초록 옷소매의 그대여 지금은 안녕, 안녕.
신께 기도드리오니 당신이 안녕하시길
나는 아직도 당신의 순정한 사랑이오니
내게 다시와 나를 사랑해주시길


 

Greensleeves

Alas, my love, you do me wrong
To cast me off discourteously
For I have loved you well and long
Delighting in your company.
Greensleeves was all my joy
Greensleeves was my delight
Greensleeves was my heart of gold
And who but my lady Greensleeves
Your vows you’ve broken, like my heart
Oh, why did you so enrapture me
Now I remain in a world apart
But my heart remains in captivity
Greensleeves was all my joy
Greensleeves was my delight
Greensleeves was my heart of gold
And who but my lady Greensleeves.
I have been ready at your hand,
To grant whatever you would crave,
I have both wagered life and land,
Your love and good-will for to have.
Greensleeves was all my joy
Greensleeves was my delight
Greensleeves was my heart of gold
And who but my lady Greensleeves.
If you intend thus to disdain,
It does the more enrapture me,
And even so, I still remain
A lover in captivity.
Greensleeves was all my joy
Greensleeves was my delight
Greensleeves was my heart of gold
And who but my lady Greensleeves.
Ah, Greensleeves, now farewell, adieu,
To God I pray to prosper thee,
For I am still thy lover true,
Come once again and love me.
Greensleeves was all my joy
Greensleeves was my delight
Greensleeves was my heart of gold
And who but my lady Greensleev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