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아래 하늘이요 하늘 위가 물이로다 이 중에 늙은 눈에 뵈는 꽃은 안개 속인가 하노라 풍속 화가로 유명한 김홍도, 실재로는 음악의 대가로 빼어난 시인으로 서예가로 문학적 소양 또한 깊은 화가였다. 이 작품은 느긋하고 한가로운 기운이 감도는 노년의 서정이 엿보이는 작품으로 커다란 화폭에 경물은 오분의 일도 채 되지 않는다. 뿌옇게 떠오르는 공간에 중간의 가파른 절벽 위로 몇 그루 꽃나무가 안개 속에 슬쩍 얼비치며 왼쪽 아래 산자락에 뱃사공과 꽃을 치켜다보는 노인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주상관매도 designtimesp=29041>는 그림보다는 여백이 더 부각되는 작품으로 여백이 하도 넓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작가는 화제로 “노년화사무중간(老年花似霧中看)” 이라 썼다. “늙은 나이에 뵈는 꽃은 안개 속을 보는 듯 하네”. 주인공의 쓸쓸한 심정을 노래하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정조의 각별한 사랑을 받아 오다가 정조가 승하하고 난 뒤 병고와 가난에 시달리며 불우한 노년을 보내면서 그린 작품은 아니었을까.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중에서) 용인시민신문 |
2015년 8월 4일 화요일
김홍도의 <주상관매도>
소한식주중작(小寒食舟中作)-두보(杜甫)
소한식날 배 안에서 짓다-두보(杜甫)
佳辰强飮食猶寒(가진강음식유한) : 명절이라 억지로 먹으니 음식이 차고
隱几蕭條戴鶡冠(은궤소조대할관) : 앉은 자리 쓸쓸하고, 관은 초라한 할관을 쓴다
春水船如天上坐(춘수선여천상좌) : 봄물은 불어나 배가 하늘 위에 앉은 듯
老年花似霧中看(노년화사무중간) : 늙은이 눈에는 꽃이 안개 속에 보이는 듯 하여라
娟娟戲蝶過閒幔(연연희접과한만) : 곱게도 노는 나비는 한가히 장막을 지나가고
片片輕鷗下急湍(편편경구하급단) : 여기저기 무리지은 갈매기들 급한 여울 내려간다
雲白山靑萬餘里(운백산청만여리) : 청산에는 흰구름 만리나 멀리 떠가니
愁看直北是長安(수간직배시장안) : 수심에 바로 북쪽 바라보니, 그곳이 장안이로다
꽃에 빠지고 매화음(梅花飮)에 취하고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독서여가도(讀書餘暇圖)>라는 그림이 있다. 더운 여름 한 선비가 책을 읽다 말고 툇마루에 비스듬히 앉아 부채를 부치며 더위를 식히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뒤로 보이는 책장엔 책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고, 열려 있는 책장문의 안쪽에는 정선 화풍의 산수화가 붙어 있다. 부채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부채그림 역시 얼핏 보기에 정선화풍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누군가는 이런 이유등을 들어 이 그림이 정선의 자화상이지 않을까 추측하기도 한다. 잠시 책을 물리고 휴식을 취하는 주인공 선비는 고급스런 도자기 화분에 심어 놓은 화초를 감상하고 있다. 그 화초는 작약과 난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선비의 모습이 흥미롭다. 꽃을 바라보는 그 모습이 망연(茫然)하기 때문이다. 마치 꽃에 넋을 잃은 듯하다. 저렇게 꽃에 빠져 있다니…….
요즘도 집 마당에 꽃을 키우거나 화분에 화초를 키우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조선시대라고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달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이 그림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꽃을 표현한 그림은 많지만 누군가가 꽃을 감상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리라. 꽃 얘기 하는데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1745~1805년경)를 빼놓을 수 없다. 김홍도는 이런 일화를 남겼다.
김홍도는 집이 가난하여 더러는 끼니를 잇지 못하였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매화 한 그루를 파는데 아주 기이한 것이었다. 돈이 없어 그것을 살 수 없었는데 때마침 돈 3000전을 보내 주는 자가 있었다. 그림을 요구하는 돈이었다. 이에 그중에서 2000전을 떼어내 매화를 사고, 800전으로 술 두어 말을 사다가는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梅花飮)을 마련하고, 나머지 200전으로 쌀과 땔나무를 사니 하루의 계책도 못 되었다.
매화를 감상하면서 술을 마시는 것을 옛사람들은‘매화음(梅花飮)’이라고 불렀다. 단원은 매화음을 꽤나 좋아했던 것 같다. 매화음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단원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다.
그림 아래쪽을 보자. 선비 두 사람이 한가로이 뱃놀이를 하고 있다. 왼쪽의 흰옷 입은 사람은 좀 젊어 보이고, 오른쪽 연한 치자빛 옷을 입은 사람은 그보다는 나이가 많아 보인다. 치자빛 옷 색깔이 참 인상적이다. 그림 윗부분으로 눈길을 돌리니 언덕에 봄날의 매화가 피었다. 작은 배에서 두 사람의 선비가 고개를 들어 언덕 위의 매화를 바라보고 있다. 배한가운데에는 작은 서안(書案)이 있고 그 위엔 도자기 술병이 놓여 있다. 저 여유로운 매화음! 그 분위기만큼이나 그림은 온통 여백이다. 그 여백이 무척이나 깊다. 시정(詩情)도 그윽하다. 김홍도는 그림 오른쪽 위에 중국 시인 두보(杜甫)의 시 한 구절을 써 넣었다. ‘老年花似霧中看(노년화사무중간)’, ‘늙은이가 보는 꽃은 안개 속에서 보는 것 같다’는 뜻. 이 구절을 읽고 나니 화면의 여백이 안개 속 같아 보인다. 욕심을 버리고 매화를 벗하며 살아가는 조선 선비들의 낭만이 저런 것일까.
조선시대 선비나 문인예술가들은 이렇게 꽃을 사랑하고 매화음을 즐겼다. 그럼, 대체 어느 정도 꽃을 좋아했던 것일까. 18, 19세기 꽃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다. 꽃의 감상은 물론이고 수집과 재배도 유행이었다고 한다. 소나무, 대나무, 국화, 매화의 분재를 좋아했다. 동백처럼 남녘땅에서 자라는 꽃나무들도 한양으로 들여와 사고팔았다. 국화꽃도 인기가 높았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역시 서울 명례방 집에 16종의 국화 화분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다양한 종류의 국화로 집을 꾸미는 사람도 많았고 국화꽃을 감상하는 모임까지 열렸을 정도였다. 이렇다보니 한양엔 꽃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매화 분재를 출세길의 뇌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수선화를 좋아했다. 그는 제주 유배시절, 수선화의 청순함을 보면서 시련을 견뎠고 다산 정약용에게 수선화를 선물하기도 했다. 18, 19세기 사람들은 이렇게 꽃을 좋아했다.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 1707~1769)의 <선유도(船遊圖)>에서도 꽃을 좋아했던 선비들의 청완(淸玩) 취미를 엿볼 수 있다. 파도가 거칠게 일렁이는 바다에서 뱃놀이를 하는 선비 두 명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들의 뱃놀이가 범상치 않다. 파도가 소용돌이치는데도 두 선비는 태연자약이다. 안달이 난 파도를 향해 외려 옅은 미소를 보내며 관조하고 있다. 엉덩이를 쭉 빼고 배의 균형을 잡으려 힘겹게 노를 젓고 있는 사공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배 위의 풍경이다. 그 소용돌이의 와중에 배 한가운데 에 서안이 떡 하니 놓여 있고 그 위에 서책과 자기 화병, 술잔이 놓여 있다. 화병에 홍매(紅梅)가 꽂혀 있으니 이 또한 선상(船上)의 매화음이다. 서안 바로 옆엔 고목등걸이 있고 그 꼭대기에 학이 앉아 있다. 이것도 경이로운 풍경이다. 배는 흔들리는데 학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학은 바다에서 날아온 학이 아니라 두 선비가 키우는 애완용 학일 것이다. 조선 후기엔 집에서 학을 키우는 선비들도 있었다. 저 위태롭기 짝이 없어 보이는 파도 속에서도 매화음을 즐기며 뱃놀이를 하는 옛 사람들의 여유로운 아취! 그림으로 보니 더욱 이색적이고 흥미롭다.
글˚이광표 (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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