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5월, 魚允迪(어윤적) 초대 교장은 한 高官大爵(고관대작) 집의 대문을 두드렸다.
“이 댁에 따님이 있으시죠? 따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십시오.”
무슨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던 고관대작에게 어 교장은 학교에 대해 한참 설명했다. 그는 또 다른 높은 벼슬아치의 집을 찾아가 “귀댁의 여조카를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하고 사정했다.
초대 교장은 당시 촉망 받던 권문세가의 집, 고관대작의 집, 양갓집으로 소문이 난 곳은 빼놓지 않고 일일이 찾아갔다. 좋은 집안의 女息(여식)들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어 교장의 설득과 입소문으로 인해, 몇 달 뒤 10代(대)의 어린 소녀들이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에 있는 작은 한옥으로 모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정부에서 세운 최초 官立(관립) 여학교의 시작이었다.
학교장이 일일이 여학생을 찾아나서야 했을 만큼 열악한 상황. 초라하게 출범한 이 학당은 2년 만에 각지에서 몰려드는 학생들을 수용하지 못해 넓은 곳으로 이사를 했고, 100여 년 역사를 이어오며 걸출한 여성 인재들을 쏟아냈다. 바로 경기여자고등학교(이하 경기여고) 이야기다.
100년 동안 4만 명 동문 배출 기여고가 오는 10월,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숙명여고ㆍ이화여고ㆍ진명여고ㆍ배화여고 는 몇 해 전에 이미 백돌을 넘겼다. 하지만 경기여고는 宣敎(선교)를 목적으로 국내에 온 외국인들이나 개인 독지가에 의해 세워진 사립학교가 아니라 ‘국내 최초의 官立(관립) 여학교’라는 점에서 100주년의 의미가 남다르다. 주영기 경기여고 교장은 “경기여고의 100년史(사)는 일제 강점기, 해방, 정부수립, 국토분단, 6ㆍ25 전쟁 등 대한민국 격동의 파노라마를 그대로 담고 있다”고 회고했다.
경기여고가 주목 받는 이유는 100년 역사뿐만이 아니라 각계 각층에 수많은 유명 인사들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경기여고는 약 4만 명의 여성 인재를 배출했는데, 그중에는 법조계(판ㆍ검ㆍ변호사) 인사 30여 명, 국회의원 및 장관 30여 명, 100여명의 문화 예술계 저명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의료계 및 학계 인사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동문회 측은 어림잡아 1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특히 경기여고는 이 땅의 수많은 政界(정계)ㆍ財界(재계)ㆍ學界(학계)의 안주인들을 배출했다. 경기여고의 인맥도는 오늘날 대한민국 권력지도와 거의 비슷하다.
경기여고 내에서도 63회 졸업생(1975년 졸업)은 사회적인 지명도가 높은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특별한 기수로 꼽힌다.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여성 법무부 장관을 지냈던 康錦實(강금실) 前 장관, 국내 최초의 여성 대법관인 金英蘭(김영란) 대법관, 검사 출신 3選(선) 의원인 趙培淑(조배숙) 민주당 국회의원이 63회다. 줄기세포 논란이 일 때 黃禹錫(황우석) 교수에 대한 중간조사결과를 발표했던 노정혜 서울대 교수, 설치미술가인 양주혜 홍익대 교수, 독일ㆍ미국 등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화가 이민주씨, 한나라당 金武星(김무성) 의원의 부인 최양옥씨, 바이올리니스트이며 朴振(박진) 한나라당 의원의 부인인 조윤희씨,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리는 장영주의 어머니 이명준씨도 동기다.
경기여고 63회
63회 동문회 前(전) 대표였던 김미애씨는 “63회가 특별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63회는 ‘중학교 뺑뺑이 1세대’입니다. 이전의 기수는 경기여중 출신이 대부분 경기여고를 갔지만, 63회는 전국 각지의 중학생들이 경기여고에 입학하기 위해 시험을 치뤘어요. 경쟁이 치열했죠. 중학교 시절에는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기고만장했는데, 막상 경기여고에 들어와 보니 자신보다 뛰어난 학생들이 엄청났어요. 여기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쳤는데, 이것이 사회진출을 부추긴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윤정로 카이스트 교수는 63회가 졸업했던 시기의 사회 분위기가 한몫을 했다는 평가를 내놨다.
“63기 졸업생들이 사회로 진출했던 1980년은 여성들의 사회참여에 대한 열망과 기회가 가장 많았던 시기였어요. 뛰어난 여성들에게 기회가 주어졌고, 그러다 보니 안주인 지위에 만족했던 경기여고 동문들 중 본인이 직접 사회활동에 나서는 기회가 많았다고 봅니다.”
경기여고 63회 졸업생은 결속력이 남다르다. 6월 정기총회, 12월 송년모임, 10월 동창의 날 행사는 물론, 기총회·기독교 모임·등산팀·댄스 모임 등 소모임 활동도 활발하다. ‘63회 法曹(법조) 3인방’으로 불리는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김영란 대법관, 검사 출신인 조배숙 의원 등은 동기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고 한다. 63회 동문회 전 대표는 “졸업 30주년 기념식이 끝난 후 63회 동기생 100여 명이 단체로 해외여행을 떠났다”고 말했다.
63회가 특별하다고 하면, 섭섭해할 기수는 부지기수다. 그만큼 경기여고에는 사회활동이 활발한 동문들이 많다. 먼저 정계의 경기여고 人脈(인맥)을 들여다보자.
경기여고 출신 現 국회의원 3인방
지난 5월 임기가 시작된 18대 국회의 여성 국회의원 41명 중 경기여고 출신은 세 명이다. 조배숙 의원(3選)은 경기여고ㆍ서울대 法大(법대) 졸업 후 검사·판사를 역임한 후 정계에 입문했다. 국내 최초의 금융통화위원회 여성위원인 이성남(54회)씨는 올해 민주당 비례대표 1번으로 제18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영애(55회) 의원은 올해 자유선진당 비례대표 1번으로 제18대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17대 국회에는 경기여고 출신이 더 많아 김명자(50회), 김애실(53회), 이계경(57회), 이은영(57회), 홍미영(62회), 이경숙(60회) 전 의원 등이 국회에 진출했다. 숙명여대 총장 李慶淑(이경숙)씨와 同名(동명)인 이경숙 의원은 여성운동가이자 崔圭成(최규성) 민주당 의원 부인으로, 17대 때 나란히 당선돼 ‘부부 국회의원’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계경씨는 ‘여성신문’을 창간한 여성운동가다.
경기여고 졸업생들의 정치 활동 역사는 약 7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성 정치인이 全無(전무)하다시피 했던 시절부터 경기여고 출신들의 정계진출은 전통처럼 이어졌다. 이 학교 출신 중 가장 먼저 정계에 진출한 사람은 故(고) 片貞姬(편정희ㆍ26회) 전 독립유공자미망인회장. 1915년생인 편 회장은 1952년 在日(재일) 대한부인회 상임고문을 시작으로 정치활동을 시작, 1971~1972년 제8대 공화당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이후 국제부인회총연합회 한국본부 회장, 대한노인회 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의사 출신인 구임회(26회)씨와 이범준(40회)씨는 1973~1979년 제9대 유정회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이범준씨는 고 朴定洙(박정수) 전 외교통상부 장관 부인으로, 부부가 모두 정치학 박사학위를 따서 ‘국내 부부 정치학 박사 1호’ 타이틀을 얻었다. 그녀는 유엔총회 한국대표단 국회 대표, 유네스코총회 집행위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으로 활동했고, 현재는 새천년포럼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제10대 국회에도 현기순(유정회ㆍ26회), 김옥렬(유정회ㆍ36회)씨가 진출해 활동했다. 李明博(이명박)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이경숙(49회)씨는 제11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변호사 황산성(민한당ㆍ51회)씨도 이경숙씨와 함께 국회 활동을 했다. 41회 졸업생인 김장숙씨는 12, 13대 민정당 국회의원, 30회 졸업생인 이우정씨는 제14대 민주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애경그룹 회장 장영신(43회)씨는 제16대 국회의원, 학자 출신인 허운나(55회)씨는 제1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국회의원은 아니지만, 노미혜(50회)씨가 現(현) 한나라당 여성위원회 부위원장, 이금라(58회)씨가 現 서울시의회 의원, 신혜경(61회)씨가 現 청와대 대통령실 경제수석실 국토해양비서관, 박희성(62회)씨가 現 서울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경기여고 출신은 官街(관가)에서도 이름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盧武鉉(노무현) 정권 시절 갖가지 화제를 몰고 다니며 ‘강효리’라는 별명을 얻었던 강금실(63회) 전 법무부 장관은 憲政(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박양실(42회) 제27대 보건사회부 장관, 김명자 제7대 환경부 장관(50회), 황산성(51회) 제5대 환경처 장관 등이 모두 경기여고 출신. 김명자씨는 헌정 사상 ‘최장수 여성장관’의 기록을 갖고 있다. 그녀는 1999년 6월 손숙 전 장관이 사임한 직후 제7대 환경부 장관을 맡아 2003년 2월까지 3년 8개월 동안 재직했다.
재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 경영인 중에 경기여고 인맥이 많다. 경기여고 43회로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장영신씨는 현재 애경그룹을 이끌고 있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장 회장은 1972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남편 채몽인씨의 뒤를 이어 애경유지공업 경영을 맡게 됐다. 그녀는 이후 30여 년 만에 이 회사를 16개 계열사에 연 1조60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그룹으로 일궈냈다. 장 회장은 철탑산업훈장(1981년), 1억불 수출탑(1991년), 국민훈장 은탑산업훈장(1995년) 등을 수상, 여성 경영인으로 존경 받고 있다.
남편의 뒤를 이어 기업 경영에 뛰어든 사례로는 현정은(60회) 현대그룹 회장이 꼽힌다. 현 회장은 지난 2003년, 갑작스럽게 타계한 고 鄭夢憲(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뒤를 이어 현대그룹을 경영하고 있다. 그녀는 2007년, 美(미) <월스트리트 저널>이 선정한 ‘주목할 만한 여성 50인’에 선정됐다.
삼성그룹 창업주 고 李秉喆(이병철) 회장의 맏손녀이자 CJ그룹 계열사인 CJ엔터테인먼트 이미경 부회장은 경기여고 65회다.
李健熙(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부인이자,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으로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이고 있는 洪羅喜(홍라희)씨는 경기여고 51회다.
법조계에서는 경기여고 출신 40명 이상이 포진해 있다. 연령은 30~50대가 많다. 첫 테이프를 끊은 사람은 48회 졸업생인 강기원씨다. 경기여고ㆍ서울법대 출신인 그녀는 사법연수원 2기를 수료하고 서울민사지법 판사로 활동했다. 변호사로 개업한 후 국무총리실 여성정책심의위원, 한국성폭력상담소 초대 이사장, 장관급인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제2대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남편은 김학준 現 동아일보 회장이다. 51회 중에 전 환경처 장관이었던 황산성씨와 홍선경씨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경기여고 출신의 법조계 진출은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제18대 국회의원 이영애(55회)씨는 법무법인 ‘바른’의 고문 변호사다. 이씨는 여성 최초로 사법고시에 수석합격(제13회)해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최초의 여성 고등법원 부장판사(1995년), 최초의 여성 법원장(춘천지방법원ㆍ2004년), 최초의 여성 사법연수원 교수 등 ‘최초’ 타이틀을 휩쓸었다.
경기여고의 이런 법조 전통은 전수안(59회) 대법원 대법관, 김영란(63회) 대법원 대법관, 강금실(63회) 변호사, 청와대 민정수석실 법무비서관을 지냈던 황덕남(64회) 세계종합법무법인 변호사로 이어졌다.
경기여고의 법조인 배출은 평준화 세대인 ‘뺑뺑이 세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김은주 법률사무소 변호사 김은주(79회)씨, 김정민(80회) 수원지방법원 판사, 이윤조(80회) 김&장 변호사, 김희진(86회) 서울서부지법 판사, 반지(88회) 서울남부지검 검사 등이 법조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국가가 어찌 여자 교육을 중요시하지 않겠는가”(순종의 비가 내린 徽旨)
경기여고의 시작은 19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은 1908년, 칙령으로 최초의 관립고등여학교 설립을 허가했다. 경기여고의 전신이다. 순종의 비인 孝(효) 황후는 학교를 설립하면서 임금을 대신해 徽旨(휘지)를 내렸다.
<대개 보통교육은 남녀의 구별이 없으니, 여자는 출가해서는 남편을 돕고 가정을 다스리며 어머니가 되어서는 자녀를 부육하는 책임을 지고 항상 가정의 주인이 되어 일가의 행복을 증진하고 이를 추진하여 국운을 裨補(비보)함이 또한 클지니 국가가 어찌 여자교육을 중요시하지 않겠는가. 내가 친히 스승을 맞아 교육을 받았으며, 일반 여자로 하여금 나를 표준케 하기를 기하더니 이제 정부가 고등여학교를 한성에 창설함은 실로 나의 뜻을 이룸이라(중략).>
이렇게 하여, 한성고등여학교라는 이름으로 종로구 당주동에 있는 조그만 한옥 마을에 세워졌다. 한성고등여학교는 4년제, 총 150여명의 학생을 수용할 생각이었지만 초창기에 학생 모집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開校 첫해부터 똑똑한 학생들 입학
경기여고 100년史를 집필하고 있는 47회 졸업생 민숙현씨의 설명이다.
“구한말 시기에 서민들은 먹고살기 어려워 교육을 시킬 생각을 하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여성의 신교육에 대한 호응이 당연히 낮았죠. 초대 교장이었던 어윤적씨가 내각 관료, 고관부인 등을 찾아다니며 학생 모집에 직접 나섰다고 합니다. 첫해에 학생이 50명이 채 되지 않았어요. 학생 모집이 어려웠고, 모인 학생들 중에 시험 성적이 나쁜 사람들은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요. 開校(개교) 첫해부터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을 갖춘, 집안이 좋은 학생들만 고른 겁니다. 신식문화에 동의하는 수준 있는 집안의 자제들이 한성고등여학교로 속속 모였습니다”
―학교가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걸렸습니까.
“2년이 채 되지 않아 학교가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1910년도에는 종로구 당주동 한옥에 더 이상 학생들을 수용하기 어려워 경운동(현재의 천도교 수운회관)에 새 부지를 마련하고 현대식 건물을 지어야 할 정도였죠.”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간에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까.
“‘한성고등여학교는 특별한 학교’라는 인식이 급속하게 퍼졌다고 합니다. 과거 학교의 역사를 찾아보면 ‘대갓집에서 한성고등여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며느리로 맞기 위해 교문 앞에 줄을 섰다’는 내용이 나올 정도입니다.”
―학생들의 수준은 어땠습니까.
“향학열이 컸다고 해요. ‘학교’라는 새로운 환경을 접한 여학생들은 악착같이 공부를 했죠. 과거의 사료를 보면, 한성고등여학교에 ‘누에를 먹으면 공부를 잘한다는 소문이 퍼져, 학생들이 누에를 씹어 먹으며 공부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정부의 지원도 한몫 했습니다. 등록금을 일절 받지 않았고, 학생들의 공부에 필요한 지필묵을 모두 지원해 줄 정도로 재정적 지원이 컸습니다.”
민숙현씨의 설명에 따르면 한일합방 직후 1회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교직에 채용되는 등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일제 통치下의 경기여고
개교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1910년, 경기여고는 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당시 여자는 바깥출입의 자유가 없었고, 어쩌다 외출이라고 하려면 너울과 장옥으로 얼굴을 가리고 긴 치마를 입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초기교장이었던 어윤적씨는 긴 치마 전통 한복을 짧게 개량하고, 위ㆍ아래를 검정 옷감으로 통일시켰다. 여학생들에게 공부만 시킨 것은 아니었다. 한성고등여학교는 학생들에게 뜀뛰기와 달리기, 공치기, 줄넘기를 가르쳤다. <경기여고 80년사>에 따르면 한성고등여학교의 이 같은 방침은 완고한 보수층으로부터 지탄을 받았다고 한다.
한성고등여학교는 1911년, 경성여자보통학교로 개칭했다. 일제 치하였기 때문에 경기여고도 일본인 교장을 맞게 됐다. 1913년 오타 히데오(太田秀雄)이라는 일본인이 교장으로 취임했고, 이후 경기여고는 3대에 걸쳐 일본인이 교장을 맡았다. 1938년 당시 학교 이름을 경성고등여학교로 바꿨다.
경기여고 32회 졸업생으로 이 학교 동창회장을 지냈던 이혜자씨는 과거 청량리정신병원장을 지낸 고 최신해 박사의 부인이다. 이씨는 일제 치하였던 1938~1942년 경기여고(당시 경기高女)를 다녔다. 이씨의 회고다.
“일본 선생 20여 명, 한국인 선생 5명이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국어시간에는 ‘일본어’를 배웠고, 교내에서 학생들끼리 한국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등 감시가 심했어요. 우울한 시기였지만 일본 선생들로부터 무시 받고 자란 기억은 없어요. 일본 선생들 사이에서도 이 학교(경기高女)는 ‘빈틈없는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라고 소문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일본 교사들이 수업 시간에 입버릇처럼 ‘너희들처럼 총명한 아이들을 본 적이 없다’고 얘기하곤 했어요.”
―당시 경기高女(고녀)만의 특별한 학풍이 있었습니까.
“항상 노트 정리를 철저히 하라고 훈련 받았습니다. 노트 정리를 열심히 하다 보니, 정돈된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었어요. 한국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늘 ‘당당하게 살아라’ 하고 말씀하셨어요. 손정규 가사 선생(1회 졸업생)은 ‘일본 사람 앞에서 쭈뼛하지 말아라. 식민지 근성을 가질 필요도 없다. 수업시간에 일본인이 대체 왜 우리를 못살게 구는 것이냐는 질문을 해도 괜찮다’고 수업 시간에 말했습니다. 손 선생의 그런 말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는 ‘당당하게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경기고녀에 입학하기는 어땠나요.
“그때는 1차와 2차 고녀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1차는 경기-숙명-진명-여상 순이었고, 2차는 동덕-이화-배화-상명 순이었어요. 저는 마포에 있는 용강국민학교를 졸업했는데, 한 학교에서 평균 두 명 정도가 경기고녀에 입학했어요. 경쟁률이 3대 1 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 학년에 삼수를 해서 경기고녀에 입학한 학생이 있었어요.”
학교 규율 엄격
패션 디자이너인 노라노(34회ㆍ 본명 노명자)씨도 일제 시대인 1939~1943년에 경기고녀를 다녔다. 노라노씨는 ‘패션’이라는 개념조차 성립되지 않았던 1956년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던 패션계의 선구자다. 그녀는 “일제 시대였지만, 학내에서만큼은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고 기억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한글 교육이 없어졌습니다. 국어로 일어를 사용하던 시절이었죠. 경기 고녀는 공립학교였으니 오죽했겠습니까. 하지만 일본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어요. 학대를 받거나, 무시당했던 기억도 없습니다. 다만 독립운동가의 자녀, 사상가의 딸들을 학교에서 감시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어떤 과목을 배웠습니까.
“국어, 수학, 역사, 과학, 음악, 미술 등 다양하게 공부했어요. 입학 당시에는 영어교육이 있었는데, 2학년 올라가면서 없어졌어요.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하던 시기여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일본 사상을 공부하는 ‘公民’(공민) 시간이 있었어요. 한국 선생이 ‘다케시마’라고 창씨하고 그 과목을 가르쳤는데, 어린 마음에 당돌하게 제가 ‘왜 우리가 창씨개명을 해야 하느냐’고 따지듯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정규 수업 이외에 하루에 2시간씩 교련 수업을 받았어요.”
―학교 규율이 엄했나요.
“엄하기는 했지만, 선생들은 대부분 융통성이 있었어요. 수업 시간 중에 ‘일본 예법’이라고, 두 시간씩 무릎을 꿇고 앉아 일본 茶道(다도) 등을 배우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수업이 듣기 싫어서 무릎에 붕대 감고 꾀병을 내서, 수업시간에 다리를 뻗곤 했지만 엄하게 혼났던 기억은 없습니다.”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그녀는 하루는 수업시간에 과제를 일찍 끝내고 엉뚱한 그림을 그렸단다. 스케치북 한가운데에 교장 선생의 얼굴을 그려놓고, 주위에 아부하는 선생들의 표정을 실감 있게 그려놓은 것이다. 미술 선생은 이를 보고 혼내기는커녕, 껄껄 웃고 지나쳤다고 한다.
문학ㆍ예체능계에서 두각
졸업생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두 가지 사실이 나타난다. 경기여고가 개교한 이후 빠르게 명문 학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는 점과, 당시 공부를 잘하던 여학생들이 대거 이 학교에 입학했다는 점이다. 경기여고는 ‘여성 교육에 앞장선다’는 개교 취지에 맞게, 굵직한 여성학자들을 배출했다.
조옥라(57회)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와 장필화(58회)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 등이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는 조옥라씨는 1982년 학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줄곧 여성과 역사, 가부장제에 대한 고찰 등을 통해 여성학을 발전시켰다. 한국여성학회장을 역임했고, 지난 2005년에는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를 서울에 유치해 관심을 끌었다. 장필화씨는 현재 여성부 정책자문위원, 서울시 여성위원회 부위원장, 아시아여성학회 초대회장 등을 맡아 업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국내의 대표적 여성학자다. ‘변화하는 여성문화, 움직이는 지구촌’이라는 저서를 발간한 그녀는 2004년 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경기여고 출신들이 공부에만 소질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문학계, 예체능계에서도 경기여고 출신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경기여고 文人(문인)의 시작은 원로 문인인 고 강신재씨로부터 시작된다. 32회 졸업생인 강씨는 6ㆍ25 전쟁 이후 한국문단에서 남녀 사이의 현대적 애정 모럴을 추구한 젊은 여성작가였다. 그녀의 1960년 작 ‘젊은 느티나무’는 이복 오빠와 누이의 사랑을 담은 이야기로 당시 문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여류문학상(1963년), 보관문화훈장(1993년) 등을 수상했다.
<월간문학>으로 등단해 ‘산집인생’, ‘억새풀의 노래’, ‘사랑의 허상’ 등의 소설을 집필한 윤남경씨는 37회. ‘요절한 천재작가’로 불리는 고 전혜린(40회)씨도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그녀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서울대 강단에 섰고, 이화여대·성균관대 조교수 등을 역임했으나 서른두 살에 자살했다. 여류 법철학자이자 독일문학가였던 그녀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자전적 수필집을 남기고 떠났다.
‘청미회’의 창립 멤버였던 허영자(45회) 성신여대 명예교수는 시집 <가슴엔듯 눈엔듯>, <빈 들판을 걸어가면서>, <소멸의 기쁨> 등을 냈다. ‘청미회’는 1963년 1월, 한국문학사상 최초로 여성 시인 7명이 모여 발족한 순수시 동인회다. 1998년 해산을 선언할 때까지 35년 동안 지속적으로 활동해 국내 문학 동인 중에 최장수 기록을 가진 단체다.
강은교(52회) 동아대 한국어문학부 교수는 1968년 사상계에 등단,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시인이 시인에게 물었네> 라는 제목의 시집을 발간했다.
서강대 프랑스문화전공 교수인 최윤씨는 60회다. 그녀는 1988년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라는 단편 소설을 발간한 뒤 1990년대에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2005년에 <첫 만남>이라는 소설집을 발간했다.
문학 평론가이자 현재 영인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는 강인숙(40회)씨, 서양화가이자 시인인 방혜자(44회)씨, 중앙일보 신춘문예소설 ‘쓰러지는 빛’으로 데뷔한 희곡작가 최명희(52회)씨, 서양화가 홍정희(52회)씨, 살집이 넉넉한 테라코타 여인상으로 유명한 도예가 한애규(60회)씨 등도 경기여고 출신이다.
김혜자, 양희은, ‘자우림’의 김윤아, 박선영 등 연예계 진출
경기여고 출신들의 재주는 연예계에서도 빛을 발했다.
‘한국의 어머니’라는 수식어를 얻고 있는 배우 김혜자씨는 48회 졸업생이다. MBC드라마 ‘전원일기’, KBS 주말연속극 ‘엄마가 뿔났다’등에 출연한 김씨는 연기 생활뿐 아니라,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꾸준히 봉사활동을 펼쳐 화제가 됐다. 그녀는 학교를 빛낸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 ‘자랑스런 경기인상’을 받았다.
1971년 ‘아침이슬’이라는 노래로 데뷔해 포크가수로 맹활약하고 있는 양희은(58회)씨도 경기여고 출신이다. 양씨는 ‘한계령’, ‘내 나이 마흔살에는’, ‘한사람’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그 외에도 ‘우리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영화를 찍은 배우 김지영(81회)씨, 록밴드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81회)씨, 한국슈퍼모델선발대회 1위 출신의 모델 주정은(83회)씨, KBS 슈퍼탤런트 대상 출신으로 드라마 ‘겨울새’의 여주인이었던 박선영(83회)씨, KBS 슈퍼탤런트 19기 출신의 탤런트 배민희(86회)씨 등이 경기여고 동문이다.
패션계의 한 획을 그었던 인물들도 많다. 1956년 한국 최초로 패션쇼를 열었던 노라노씨는 34회. 노씨는 이후에 한국 최초의 기성복 패션쇼(1966년), 파리 프레타포르테 패션쇼 참가(1973년) 등의 기록을 세웠고, 윤복희의 미니 스커트를 제작해 화제를 끌었다. 그녀는 故 陸英修(육영수) 여사 등 영부인의 의상을 담당했고, 여든이 넘은 현재까지 패션 디자이너로 맹활약 중이다.
박윤정(39회)씨는 패션스쿨로 유명한 프랑스의 ‘에스모드’분교를 서울에 유치해 디자이너를 양성했다. ‘한국 패션계의 大母(대모)’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디자이너 이신우(48회)씨는 경기여고 출신이다. ‘오리지날 리’라는 브랜드를 탄생시킨 그녀는 외환위기 당시 회사가 부도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지난 2006년 ‘SFAA 서울 컬렉션’ 오프닝 무대에 서면서 재기했다.
외국에서 ‘한국’을 떠올리면 전쟁의 이미지로 자욱했던 1960년대에 세계적인 무대에서 한국의 미를 알렸던 여성이 있다. 경기여고 46회 오현주씨다. 오씨는 미스코리아 眞(진)으로 선발돼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참가, 인기상·스피치상·스포츠맨십상 등 세 개를 안고 왔다. 그녀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눈독을 들였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일간스포츠 기자 출신으로 청소년전통예술단 ‘새울림’ 단장인 구희서(45회)씨, 국립중앙극장장이자, 신기남 전 통합민주신당 국회의원의 누나인 신선희(52회)씨와 김방옥(58회)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장은 경기여고 출신의 연극계 3인방이다.
서울 음대 재학 중에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나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용희(54회)씨는 남편 이대욱씨와 함께 ‘부부 피아니스트’로 유명하다.
공부 잘하기로 유명한 경기여고 출신들이 연예계에까지 진출한 데에는 학창 시절의 자유로운 학풍이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동문들이 갖고 있는 여고시절의 추억은 공부를 했던 기억보다는 ‘즐거웠던 특별활동과 체육’이었다.
“학교 신문 <매순>을 만든다고 수업 땡땡이”(김영란 대법관)
김영란 대법관은 학창 시절 ‘범생이’였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녀는 의외로 여고시절 수업에 ‘땡땡이’쳤던 기억 등을 떠올렸다.
“동기였던 강금실 전 장관은 3년 내내 우등상을 받는 등 모범생이었는데, 저는 엉뚱한 구석이 많고 자유분방한 편이었어요. 체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체육수업시간마다 주번을 자청해 교실에 남았다가 선생님께 혼났던 기억이 선합니다. 1년에 4번씩 발간되는 <매순>이라는 학교 신문이 있었는데, 기사 쓴다는 핑계로 수업을 빼먹은 적도 여러 번이고요. 정해진 틀 속에 생활하는 것을 싫어하는 반항기질이 있었죠.”
―경기여고는 엄격했다고 들었는데, 학창 시절에 재미없으셨겠네요.
“엄격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공부 이외의 과외 활동을 참 많이 했습니다. 봄 가을이면 비원에 가서 사생대회, 글짓기, 사진촬영 중 하나를 선택해서 활동했고요. 교양독서를 읽고 시합을 치르는 ‘자유교양대회’라는 것이 있었는데, 학교에서 학생들의 참가를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첫해에 지구별 대회에서 1등을 한 뒤 다음해에 참가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선생님들이 저를 붙잡으러 오신 적도 있어요.”
―여고시절 가장 기억이 남는 점이 있다면.
“‘민속무용의 날’이 기억에 남습니다. 학급별로 나라를 지정해서, 그 나라의 민속춤을 추는 행사였습니다. 저희는 ‘그리스’를 맡았는데, 어떻게 춤을 표현할까 싶어 그리스를 주제로 한 영화를 보고, 의상을 제작하고 분주하게 지냈어요. 공연 당일 날, 학생들의 부모만 들여보내고 남학생은 절대 보내지 않았을 정도로 엄격했죠. 한번은 신문반 선배들과 부산에 갔다가 우연히 남학생들을 만나서 빵집에 앉게 됐는데, 그것이 적발돼 혼이 난 적도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원장 출신이자, 숙명여대 4選(선) 총장인 이경숙씨도 비슷한 추억을 갖고 있다.
“경기여고는 성적만 강조한 학교가 아니었어요. 다방면의 특별활동을 지원하는 학교였습니다. 저는 여고시절 육상 학교 대표선수로 발탁되어 전국중등학교 육상대회에서 우승했어요. 늘 여고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가장 즐거웠던 기억이 그것입니다. 또 의장대 활동한 것, 학교 축제 때 연극무대에 서서 여러 인생을 잠깐이나마 살아봤던 추억이 남아있습니다.”
李會昌(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의 부인 한인옥씨의 얘기다(한씨는 1953~56년에 경기여고를 다녔다).
“당시에 경기여고가 농구를 참 잘했어요. 경기여고와 숙명여고의 농구경기는 빅 매치였어요. 제 언니가 숙명여고를 다녔는데, 경기가 있는 날에 심하게 언쟁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 날에는 밥을 먹을 때도 둘이 멀리 떨어져서 먹곤 했죠. 경기여고 농구팀 경기가 제 학창 시절의 소중한 추억이에요. 체육시간에 ‘블루머’라는 짧은 체육복을 입었는데, 체육시간만 되면 이걸 입기가 참 창피했던 기억도 나고요. 요즘은 미니스커트를 입지만, 당시에는 정말 파격적이었거든요.”
한인옥·현정은씨의 추억
경기여고 10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동문 文集(문집) <그때 우리는…>에는 과거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현정은(60회) 현대그룹 회장은 “개교기념 행사로 열린 민속무용대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길쌈놀이와 스페인 플라멩코 춤을 췄는데, 교정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공부는 둘째이고, 몇 달씩 엄청난 양의 무용 연습을 했던 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조선일보 부국장을 지냈던 윤호미(48회)씨는 “고3 때 열렸던 전교 연극경연대회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우리 3학년 2반은 당대의 문제 작가 오상원의 단편 ‘잔상’을 연극 참가작품으로 골라 공연을 했다. 대학입시를 눈앞에 뒀지만, 저녁마다 밤늦게 모여 연습을 했다. 여고생이었던 우리는 당돌하게도 원작자 오상원씨를 찾아가 저작권 양해를 구하고, 당시 인기스타였던 KBS 임택근 아나운서, 인기 절정의 유머작가 조흔파씨를 찾아가 우리반 연극지도를 해달라고 떼를 썼다. 두 분은 흔쾌히 지도를 해주겠다며 승낙했다”고 기억했다.
서울대 약학대 교수이자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인 김영중(52회)씨는 “학교가 全人(전인)교육을 시키려고 무던히 애를 섰다. 공부는 물론 여름에는 수영, 겨울에는 스케이트, 봄가을에는 사생대회, 전교생이 참여하는 반 대항 합창대회, 포크 댄스대회, 음식이나 도넛 만들기까지 고루 익히게 했다”고 말했다.
경기여고 가족 많아
경기여고 100년사를 취재하면서 특이한 점 중 하나는 한 가족 안에 경기여고를 나온 사례가 유독 많다는 사실이었다. 당대 최고의 학교였던 만큼, 자녀를 같은 학교에 보내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해 동문의 날에는 여러 자매가 경기여고를 나온 집안에 대한 표창이 있었다. 동문 3, 4자매 ‘경기가족상’이었는데, 무려 223가족이 수상을 했다. 소설가 박완서씨가 경기여고 3 자매를 키운 어머니로 표창을 받았고, 정운찬 前 서울대 총장 부인 최선주(57회)씨 3자매, 가수 이미배(57회)씨 3자매가 수상했다. 올해 동문의 날에는 2대에 걸쳐 5母女(모녀) 이상의 경기여고 출신을 가진 집안에 대해 표창할 예정이라고 한다.
김상협 前 국무총리 집안은 부인 김인숙(31회)씨 외에 세 딸과 며느리 등 2代에 걸쳐 이 학교 출신이 33명이다.
제9대 재무부 장관과 수출입은행장을 역임한 宋仁相(송인상) 효성그룹 고문의 집안은 2대에 걸쳐 다섯 모녀가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송 고문의 부인인 최연순(23회)씨를 비롯해 네 명의 딸 원자(46회), 길자(48회), 광자(50회), 진주(52회)씨가 모두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송광자씨는 대한적십자사 여성봉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부인이다.
삼성家(가)에는 경기여고 출신이 다섯 명이다. 삼성리움관장이자 이건희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51회)씨를 비롯, 고 이병철 삼성그룹 명예회장의 맏며느리인 손복남(40회)씨, CJ엔터테인먼트 부회장이자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누나인 이미경(65회)씨, ‘아름지기’ 이사장이자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부인 신연균(58회)씨, 홍석규 보광그룹 회장 부인 이계명(62회)씨 등이 경기여고 선후배 지간이다.
경기여고 동창회장을 맡았던 이혜자(32회)씨도 경기여고 가족이다. 이씨의 동생으로 서울대 가정대학장을 지낸 혜수(34회)씨, 미국에 거주 중인 혜선(35회)씨와 혜경(41회)씨, 인하大 교수인 혜영(41씨)가 경기여고 선후배지간이다. 세 딸 중 최은희(53회)씨, 최은미(66회)씨, 며느리 윤난지(60회) 이화여대 교수와 임인경(60회) 아주대 교수도 동문이다. 그녀는 “같은 조건이면 경기여고 출신의 며느리를 보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여고 선생님들 덕분에 예민한 시절 잘 넘겨”(홍라희 삼성리움관장)
홍라희 삼성리움관장의 경기여고 학창시절에 대한 회고다.
“여고를 다니던 때 4ㆍ19가 일어나서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홍 관장의 부친 洪璡基씨는 4ㆍ19 후, 제1공화국 내각에 참여하여 부정선거를 한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편집자 주). 심리적으로 너무나 지치고 힘든 시기인 데다, 사춘기여서 예민하기도 했어요. 이런 상황을 잘 넘길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은 여고 선생님과 동기들이었어요. 선생님들이 제가 열등감 없이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도록 많은 격려를 해주셨어요.”
―학창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박은혜 교장(제8대 교장)선생님이 조회 때마다 단아한 모습으로 단상에 올라가 얘기하시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해요. 박 교장 선생님은 늘 우리들한테 ‘너희는 잘할 수 있다. 여자들도 남자 못지않게 잘할 수 있어’라고 말씀하셨어요. 박 교장님의 얘기를 듣다 보면, ‘아, 난 정말 잘할 수 있나 보다’ 하는 자긍심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요즘 여고 때 동창들을 만나보면 여전히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요. 당시에는 여성이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가 아니어서, 사회 활동을 하지 않은 친구들이 많았죠. 그 친구들의 死藏(사장)된 능력이 너무 아깝고 안타깝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가끔 경기여고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안타깝고요.”
―어떤 식의 오해 말이죠.
“간혹 경기여고 출신들이 남을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인 양 오해를 받곤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 오해를 받을 때마다 섭섭해요.”
“진리를 추구하고 그것을 수호하는 용기”(이영애 국회의원)
이영애 자유선진당 국회의원의 이야기다.
“경기여고는 전통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의 단조롭기까지 한 생활의 연속이었어요. 잘 훈련된 병사들이 모인 병영 같은 모습이랄까요? 하지만 1년에 한 번 있는 합창대회, 민속무용 경영대회는 개인적인 영역을 벗어나 다 같이 협력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일이었죠. 이런 활동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생활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흡수된 고도의 훈련이라고나 할까요. 개인과 단체를 교묘하게 조화시키는 교육 방법을 당시에 시행했다는 것이 경기여고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고시절의 교육이 이 의원께서 진로를 결정할 때 영향을 끼쳤습니까.
“스스로 책임지고, 자기가 중요 사안을 선택해야 한다는 용기는 경기여고 다닐 때에 받았던 교육이었습니다. 저는 외조부와 부친이 법조인이어서, 어린 시절부터 법조인이 매력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원래 법대를 가려고 했는데, 당시 사회 분위기는 여자가 법학을 전공하는 것에 대해 기이하게 생각하는 면이 좀 있었어요. 부모님도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행복한 여성의 삶이라고 생각하시는 편이었죠. 결국 부모님의 권유로 서울대 영문과에 갔지만, 2학년 때 전공을 바꿨습니다. 문학도 재미있었지만, 현실세계에서 가치를 구현하는 법조인이 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금 생각해도 그때 올바른 결단을 내렸다고 생각해요. 勇斷(용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경기여고의 교육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 여학교 시절의 교육이 법조인으로서 생활하는데 어떤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세요.
“‘여자가 희귀한 법조계에서 살아남기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때마다 항상 프라이드를 가지라는 경기여고의 유언무언의 교육과 전통이 어려운 환경을 두려움 없이 헤쳐나간 힘이 됐다고 얘기하곤 합니다. 명예 감정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기 때문에 항상 自重自愛(자중자애)하게 됩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바른 길을 걸으려고 노력하고요. 이 가르침은 여고가 제게 준 가장 큰 선물이자 은혜라고 생각해요. 제가 보기에 경기여고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프라이드’입니다. 정신은 진리를 추구하고 그것을 수호하는 용기고요. 옳지 않은 일에 분명히 반대하고 옳은 일은 수행해 나가는 것이 제가 커리어를 유지하면서 한시도 잊지 않은 정신입니다.”
“여고 선생님들 보며 교육자의 꿈 키워”(이경숙 숙대 총장)
이경숙 숙대 총장이 진로를 선택할 때에도 여고 시절의 기억은 큰 영향을 끼친 듯싶다.
이 총장의 얘기다.
“여고 시절에 선생님들의 성실하고 책임감 넘치는 모습을 보면서, 학생들을 양육하고 돌보는 교육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가르쳐준 내용이나 얘기를 들으면서 가보지 못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던 것 같고요. 선생님들과 얘기를 주고받으며 배운 수업시간이 제 창의력과 지적 탐구력을 계발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경기여고 학생들의 이미지는 어땠나요.
“경기여고생들은 늘 정갈하고 단정한 이미지였어요.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주도적이었던 태도도 떠오르고요. 校歌(교가) 중에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워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이 경기의 정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성과 의지와 감성에 있어 균형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죠.”
학·의료계에는 경기여고 출신 인사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개교 100주년을 맞아 사회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동문 명단을 찾아내면서, 윤정로 카이스트 교수가 가장 고심했던 대목 중 하나다.
윤 교수는 “경기 출신 중에 학계로 진출한 사람이 워낙 많아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사람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파악된 인원만 해도 어림잡아 1000명이 넘는다.
경기여고 출신 중 최초로 대학 총장을 했던 사람은 故 고황경(14회) 서울여대 명예총장이다. 1909년생인 故 총장은 경기여고 졸업 후 1920년대에 일본 도시샤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渡美(도미), 1937년 미시간대학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던 신식 여성이었다. 그녀는 경기여고 교장(1945~1946년)을 지낸 뒤 다시 미국으로 떠나 프린스턴대와 컬럼비아대에서 인구문제를 연구했다. 1950년대에는 영국유엔협회 주최로 한국, 아세아와 국제문제에 대해 800여 차례 강연을 했다. 고 총장은 서울여대를 설립하여 24년 동안 총장을 역임했다. 그녀는 이외에도 15차 UN총회 한국대표·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경기여고 출신 교육계의 별들
故 조기홍(14회)씨는 1982년부터 성신여대 총장을 지냈고, 36회 김옥렬씨는 1981~1989년 숙명여대 총장을 지냈다. 김 전 총장은 1967년 미 브린마워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은 후 1958년부터 숙명여대 강단에 섰다. 그녀는 국무총리실 여성정책위원, 통일고문회의 고문, 국제정치학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한미협회·호암재단 등 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경숙 숙대 총장은 학계를 대표하는 경기여고 출신 인사다. 경기여고를 졸업한 후 숙명여대 수석입학ㆍ수석졸업을 한 그녀는 미 사우스캐롤라이나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및 비교정치학을 전공했다. 이 총장은 1994년부터 15년 째 숙명여대(제13~16대 총장)를 이끌어 오고 있다. 16대 국회의원을 지낸 허운나(55회)씨는 2004~2006년 한국정보통신대학 총장을 지냈고, 49회 유의경씨는 세종대 부총장을 지냈다.
경기여고 출신의 교육계 진출은 1960년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현기순(26회) 서울대 명예교수, 나복영(31회) 고려대 명예교수, 이기원(37회) 서울대 명예교수, 김인자(39회) 서강대 명예교수 겸 한국심리상담 연구소장, 이수재(40회) 이화여대 명예교수, 허영자(45회) 성신여대 교수, 박수연(46회) 이화여대 교수, 한용봉(47회) 고려대 명예교수, 이기춘(49회) 서울대 교수, 이온죽(51회) 서울대 교수, 김미경(52회) 이화여대 교수, 백명현(55회) 서울대 화학과 교수, 윤정로(61회) 카이스트 교수 등이 있다.
의료계에도 경기여고 출신이 즐비하다. 한국희귀질환연맹을 창립한 김현주(49회) 前 아주대 의대 교수, 서울대 약학과 교수인 김영중(52회)씨, 이화여대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인 서현숙(55회)씨, 연세대 방사선종양학교실 교수 서창옥(59회)씨, 강동병원장인 이혜란(60회)씨, 아주의과대학장 임인경(60회)씨, 한의사 이유명호(60회), 서울의대 교수인 안규리(61회)씨 등이 경기여고를 나왔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논란 당시 화제에 올랐던 안규리 교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진료소인 ‘라파엘의 집’도 운영하고 있다. 각양각색의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경기여고 출신 학계 사람들의 열거는 지면상 줄인다.
언론인, 방송인도 다수 배출
경기여고 50~70회 졸업생 중에 언론, 방송계로 진출한 사람도 여럿이다. 44회 임국희씨는 학교의 자랑 중 하나다. 임씨는 1961년 KBS 아나운서를 시작으로 MBC, 서울방송, 교통방송 등에서 아나운서로 활약했다. 그녀의 프로그램 중 MBC의 ‘임국희의 여성살롱’은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기록돼 있다.
윤호미(48회)씨는 조선일보 부국장 출신으로, 34년 동안 기자생활을 해서 화제에 올랐던 인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1985년 해외 특파원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대한일보 편집국 기자출신인 이경순(51회)씨는 지난 6월까지 영상물등급위원회 제3기 위원장을 지냈다. 중앙일보 편집위원을 지낸 박금옥(51회)씨, 연합통신 논설위원 출신 윤혜원(53회)씨 등이 있다.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인 박명진(54회)씨는 초대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을 맡고 있고, 김현숙(53회)씨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예능PD를 맡아 관심을 받았다.
중앙일보 기자 출신의 홍은희(62회) 명지대 디지털미디어학과 교수, 조선일보 기자 출신의 신세미(63회) 문화일보 전문기자, 톡톡 튀는 프로그램 진행으로 유명한 KBS 아나운서 출신 이숙영(64회)씨와 KBS 아나운서 출신으로 서울시 홍보담당관을 지냈던 정미홍(65회)씨도 경기여고를 나왔다.
사회단체에서 활약中인 인사들
경기여고 출신 중에는 각종 사회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이대 영문과 명예교수인 윤정옥(33회)씨는 한국 정신대대책협의회 공동 회장을 맡고 있다. 35회 조명진씨는 평생 정신지체자 및 나환자들을 돌본 공로를 인정받아, 인권 옹호 10주년 기념 공로상을 수상했다. 정세화(39회)씨는 전 여성개발원장을, 오덕주(40회)씨는 서울국제부인회를 창설해 초대회장을 지냈고, 김천주(41회)씨는 주부클럽 회장을 맡고 있다. 42회 박동은씨는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냈다. 조규자(43회)씨는 남편 김대주 박사와 아프리카 니제르에서 30년 간 봉사활동을 해서, KBS가 주관한 4회 해외동포상을 받기도 했다. 김은영(48회)씨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매듭장, 장성자(50회) 前 양성평등교육원장, 김춘강(52회)씨는 대한어머니회중앙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박은경(52회)씨는 대한YWCA연합회 회장, 여성환경연대 공동대표를, 정광화(54회)씨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 나도선(55회)씨는 한국과학문화재단을 맡고 있다.
경기여고의 인맥은 해외로까지 이어진다.
32회 허병열씨는 뉴욕한국학교 교장을 지냈고, 36회 전혜성씨는 미 예일대에 동암연구소를 설립했다. ‘빛의 화가’로 불리는 방혜자(44회)씨는 프랑스 국비유학생 1호의 타이틀을 갖고 있으며, 이덕희(47회)씨는 하와이토카이 국제대학 이사장이다. 이씨는 ‘한인 미주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총부회장을 맡고 있다.
52회 송진주씨는 세계적인 물리학자다. 송인상씨의 딸인 그녀는 예일대에서 물리학 석·박사를 받은 뒤, MIT 공대 책임연구원, 남가주대 물리학과 교수를 거쳐 미국 물리학협회 이사를 맡았다. 현재 캘리포니아대 교수이자, 재미 한인물리학협회장, 미 국립과학재단 자문위원, 미 광학협회 자문위원, 미 국방부 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 60회인 김명희 선교사는 미국에서 활동 중이다. 1975년 미국으로 이민을 간 그녀는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데, 흑인 빈곤층 밀집지역인 할렘에서 선교활동을 벌여 동문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기도 했다.
‘최초’의 산실, 경기여고
경기여고가 당대 여성의 최고 교육 기관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어지간한 ‘국내 최초 여성’의 타이틀은 모두 가지고 있어서다.
3회 허영숙씨는 국내에서 최초로 병원을 개업한 여성개업의다. 그녀는 <무정>을 집필한 소설가 춘원 이광수씨의 부인이다. 같은 기수 졸업생인 이각경씨는 국내 최초의 여기자로 ‘매일신보’에서 활동했다.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로 ‘死(사)의 찬미’라는 앨범을 발표했던 윤심덕(4회)씨도 경기여고를 나왔다. 9회 졸업생 최은희씨는 최초의 민간신문 여기자였고, 12회 고봉경씨는 美군정시절 초대 경무부 여성경찰국장, 16회인 마현경씨는 국내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를 지냈다.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최은희 여기자상’은 그녀의 유언으로 제정된 상이다.
국내 최초의 여성과학자 김삼순(18회)씨, 국내 최초의 이공계 여성 박사학위 소지자 함복순(23회)씨가 이 학교를 졸업했다.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편정희(26회)씨, 최초로 꽃꽂이 개인전을 연 임화공(30회)씨, 초전퀼트 박물관장 김순희(39회)씨, 최초의 여성 외교관 홍숙자(40회)씨, 국내 최초 여자치과의사회 초대회장 김찬숙(44회)씨, 국내 최초로 미스유니버스에서 수상한 오현주(46회)씨 등이 있다.
국내 최초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최초의 여성 외과의사 박귀원(54회)씨, 최초의 여성 금통위원인 이성남(54회)씨, 최초의 국내 공식 동시통역사 김지명(55회)씨 등이다. 외대 통역대학원 1기인 김지명씨는 APEC, ASEM 정상회담 에서 대통령 통역을 맡았고, 현재 한국통번역사협회 초대회장을 맡고 있다.
윤정로 교수는 “最初, 最高, 最大의 기록을 가진 경기여고 출신들을 찾으면서 앞선 세대에 대한 존경심이 들었다”고 했다.
윤 교수의 얘기다.
“모교 100년史를 준비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성찰의 기회가 됐습니다. 요즘은 박사학위를 따는 여성들이 많지만, 여성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시기에는 드문 일이었죠. 앞이 깜깜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한 모교 선배들을 접하니 존경심이 들더라고요. 선구자적인 선배들을 보면서 경기여고의 엘리트 교육의 의미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과거의 자료가 많지 않아 모교 출신 인사를 더 많이 찾지 못한 점이 아쉽네요”
1973년, 고교평준화 정책으로 ‘뺑뺑이 세대’ 등장
개교 초기부터 국내의 최고 여학교로 불려온 경기여고는 1973년을 기준으로 큰 변화를 맞게 됐다. 시험이 아닌 추첨으로 고등학교를 배정하는 고교평준화 정책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경기여고만의 문제는 아니었으나, 학교와 학생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사실로 보인다.
소위 ‘시험을 쳐서 들어간 세대’와 ‘뺑뺑이 세대’가 갈리게 된 것. 경기여고 65회는 ‘뺑뺑이 첫해’졸업생들이다. 시험을 통해 선발된 2~3학년 선배들과 함께 학교를 다녀야 했던 그들의 충격은 상당히 커 보인다. 홍콩 상하이은행에서 근무했던 손효남(65회)씨는 학교 문집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입학식은 환영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도대체 너희들이 이 학교를 어떻게 만들까’하는 염려스러운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한창 사춘기였던 우리 기수들은 졸지에 천덕꾸러기가 됐다. 공부를 못하면 ‘뭐는 잘하겠어’라고 하고, 잘하면 잘하는 대로 ‘웬일로 그건 잘해’라는 소리를 들었다. 예민한 시기라 실제보다 더 예민하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적어도 평준화 첫해에 우리가 경기인이 되기엔 좀 어려운 분위기였다. 같은 야단을 맞을 때도 대부분 한마디가 더 붙곤 했다. 지금이라면 도저히 쓸 수 없는 단어가 선택되어 우리를 야단치는데 사용되었다.”
66회 기 대표였던 권혜경씨는 비슷한 기억을 떠올렸다.
“학교 다닐 때 선배들을 보면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던 기억이 있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질감 같은 분위기가 팽배했었죠. 그랬기 때문에 더 악착같이 공부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선배들이 이뤄놓은 전통에 먹칠하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감, 또 우리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들이 어우러져서 이를 악물고 공부했던 친구들이 많았어요.”
경기여고 내에서의 이 같은 이질적 문화는 과거 경기여중을 거쳐 경기여고에 입학하던 시절과, 다른 중학교에서 경기여고에 입학했던 때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산성(51회) 전 환경처 장관의 얘기다.
“저는 지방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여고에 입학했습니다. 경기여중을 졸업한 뒤 학교에 온 친구들이 저와 같은 非(비)경기여중 학생들을 ‘타교생’이라고 불렀어요. 경기여중ㆍ고를 진학한 학생들의 프라이드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선생들도 얘기를 시작할 때 ‘대 경기여고생이~’라고 말문을 열곤 했죠. 그렇다 보니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침묵 속에서 학교 생활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죽하면 말수가 적은 제가 신비로워 보였는지, 여학생들로부터 연애편지 같은 것이 올 정도였으니까요.”
“추첨 세대에게 역사와 전통 알려주기 위해 노력”(이숙영 前 교장)
이숙영(47회) 교장은 1999~2003년 경기여고 교장을 지냈다. 그녀는 ‘뺑뺑이 세대’를 책임지는 교장이었다.
“추첨을 통해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에게도 늘 경기여고의 역사와 전통을 알려주기 위해 노력했어요. 개교기념식, 졸업식 때 경기여고 출신들이 참석해 축사를 할 때마다 얘기를 했죠. 가령 ‘지금 너희에게 얘기를 해주는 분이 너희의 선배인 누구다’, ‘현재 장관을 맡고 계신, 너희 선배 누구다’하는 식으로요. 학생들이 ‘와’하고 환호를 해요. 시험을 쳐서 들어온 세대는 아니지만, 자신의 선배들이 사회 곳곳에서 훌륭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것이 무척 자랑스러웠던 모양이에요.”
이 교장은 “과거의 경기여고 교복을 오늘날까지 입는 것도 전통의 계승”이라고 말했다.
“깃이 넓은 흰색 블라우스에 남색 A라인 스커트가 어찌 보면 요즘 말하는 예쁜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교사, 학부모, 학생들이 세련된 스타일 대신에 전통이 살아있는 이 옷을 선택했고,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진 학생들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1990년대 초반, ‘개포동 경기여고’시대에 학교를 다녔던 록밴드 ‘자우림’의 김윤아씨의 얘기다.
“저는 사실 경기여고를 다녔기 때문에 지금 음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고등학교 때 제 커리어를 결정할 만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많았거든요. 뮤지컬이 기억에 남아요. 경기 여고는 특별 교육이 강했어요. 1학년 때, 특별부 선배들이 교실을 찾아 다니면서 대학처럼 홍보하고, 자신이 소속돼 있는 특별활동부에 들어오라고 얘기하곤 했죠. 학교에서도 이런 활동을 자연스럽게 장려하셨던 것 같아요. 뮤지컬 몇 편을 만들어서 무대에 올리고, 2학년 때는 메인 스태프가 되어 출연도 하고, 노래도 하고 했어요.”
―여고 시절의 경험이 오늘날 가수 활동을 하는데 영향을 끼쳤나요.
“다른 학교는 음악부장이 없었는데, 경기여고는 있었어요. 저는 음악부장을 자원해서 하곤 했어요. 당시에 열정적인 음악 선생님들이 참 많았어요. 공부뿐 아니라, 교양을 갖춘 학생들을 만들기 위한 커리큘럼이 많았다고나 할까요. 음악실에 몰래 들어가서 피아노치고, 노래 만들었던 기억이 선명해요. 음악선생님들이 ‘윤아는 꼭 음대를 가라’고 힘을 불어넣어주시곤 했어요.”
―개포동으로 이전한 평준화 세대에 경기여고를 졸업했는데요.
“무슨 얘기 하시는지 알아요(웃음). 저희 학교 다닐 때 그런 이야기가 많았어요. ‘선배들이 후배들을 후배취급 안 한다’ 뭐 그런 얘기요. 근데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지리라고 믿고요.”
―1990년대 경기여고는 자유로웠나요.
“다정하면서도 엄격한 학교였어요. 엄격하지만 자상한 부모 밑에서 자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런 따뜻한 기억이 남아있는 학교예요.”
경기여고는 영부인을 배출했다. 전두환 前 대통령의 영부인 이순자(46회)씨다. 이 여사는 최근 발간된 동문 문집에서 ‘개교 100주년의 감회’에 대해 밝힌 바 있다. 그녀는 “자랑스러운 선배님들과 후배들이 함께 한 사람의 경기의 딸이라는 사실이 가슴 벅찼다.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이끌어 올리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한 수많은 인재들, 또 그들 곁에는 늘 그 남편에 못지않은 현명함과 능력으로 남편의 힘을 배가해 주는 부인들이 있었고, 그들 중 많은 분들이 바로 경기의 딸들이었다”고 얘기했다.
경기여고 44회
영부인 이순자 여사의 말처럼, 경기여고에는 남편의 힘을 배가해 주는 부인들이 많다.
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27회)씨, 삼양사 계열인 고 김상준 삼양염업 명예회장의 부인 구연성(28회)씨가 경기여고를 나왔다.
숙명여대 재단 이사이자, 고 김효규 전 아주대 총장의 부인 이귀명(30회)씨, 고 이영섭 전 대법원장의 부인 권태옥(31회)씨, 충북대와 한림대 총장을 역임한 정범모씨의 부인 주정일(31회)씨, 고 김중서 전 대법원 판사의 부인 장희순(38회)씨, 김상하 삼양그룹 회장 부인 박상례(39회)씨, 황조근정훈장을 수상한 김세권 전 서울고검장의 부인 박용언(40회)씨가 있다. 박용언씨는 두산그룹의 창업주 고 박두병 명예회장의 고명딸이기도 하다. 고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의 부인 박계희(42회)씨,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의 부인 이선영(43회)씨, 유창순 전 국무총리의 부인 이애자(43회)씨,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의 부인 이응숙(43회)씨도 경기여고 동문이다.
경기여고 44회는 세 명의 국무총리 부인과 세 명의 국회의원 부인, 두 명의 재벌家(가) 안주인이 있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의 부인 한인옥씨, 고건 전 국무총리 부인 조현숙씨, 이수성 전 국무총리 부인 김경순씨 등이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부인 윤장순씨, 3선 의원 권노갑 전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의 부인 박현숙씨도 동기 졸업생이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동생인 구자두 LG벤처투자 회장의 부인 이의숙씨,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의 부인 최금숙씨도 44회다.
경기여고 출신 정ㆍ재계 안주인들
46회에는 이순자 여사 외에 전 대한YWCA 연합회장이자 이태섭 전 민정당ㆍ자민련 국회의원의 부인인 이행자씨, 박찬종 한나라당 상임고문의 부인 정기호씨가 있다. 김덕룡 청와대 국민통합특보의 부인 김열자씨와 해태타이거즈 감독을 지낸 김응룡 삼성 라이온즈 사장의 부인 최은원씨는 경기여고 48회 출신이고,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의 부인 김영희씨와 서청원 한나라당 국회의원의 부인 이선화씨, 고흥길 한나라당 의원의 부인 임현빈씨는 50회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부인 홍라희씨는 51회고, 허동수 GS칼텍스 회장의 부인 김자경씨와 고 박정구 전 금호그룹 회장의 부인 김형일씨는 52회 동창생이다. 이외에도 방상훈 조선일보사장의 부인 윤순명(53회)씨, 이용경 창조한국당 의원의 부인 김순희(53회)씨, 최연희 무소속 국회의원의 부인 김혜동(경희대 프랑스어학과 교수·54회)씨,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부인 이명희(56회)씨가 경기여고를 나왔다. 이명희씨는 경기여고 박물관인 경운박물관장을 맡고 있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부인 이경열(57회)씨,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부인 최선주(57회)씨,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부인 신연균(아름지기 이사장·58회)씨, 이주영 한나라당 의원의 부인 허영(58회)씨,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부인 이주영(59회)씨, 최규성 민주당의원의 부인 이경숙(60회)씨, 김학원 전 한나라당 의원의 부인 차명숙(60회)씨가 동문이다.
이종구 한나라당 의원의 부인 고혜경씨, 조욱래 동성개발 회장의 부인 김은주씨, 진영 한나라당 의원의 부인 정미영씨는 61회 동창생이다.
홍석규 보광그룹 회장의 부인 이계명(62회)씨, 유일호 한나라당 의원의 부인 함경호(62회)씨, 박진 한나라당 의원의 부인 조윤희(63회)씨,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의 부인 이화익(64회)씨가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경기여고 출신 중에는 유명인사의 딸, 며느리들이 여럿이다.
김상협 전 국무총리의 세 딸과 며느리가 경기여고 출신이라는 점은 앞서 얘기한 바 있다. 이외에도 의친왕의 다섯 번째 딸인 이해경(36회)씨, 고 김인득 벽산그룹 회장의 두 딸 김인숙(46회)씨와 김연희(55회)씨가 경기여고를 나왔다. 고 이회림 전 동양제철화학 회장의 둘째딸 이숙희(47회)씨, 최규하 전 대통령의 딸 최종혜(60회)씨,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딸 박근령(61회)씨, 윤보선 전 대통령의 며느리 양은선(61회)씨, 김영삼 전 대통령의 둘째딸 김혜경(61회)씨가 이 학교 출신이다.
취재를 하다가, 이숙영 전 교장에게 “경기여고 출신들은 참 시집을 잘 간 사람도 많은 것 같다”고 했더니 이런 얘기가 돌아왔다.
“시집을 잘 갔다기보다, 경기여고를 나온 학생들의 부모님이 사위를 잘 골랐다는 표현이 적절할 수도 있어요. 경기여고를 보낼 정도로 교육열이 높고, 신식문화에 익숙한 부모들이어서, 사윗감을 신중히 골랐다고나 할까요(웃음). 시집 잘 가기 위해 공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다 보니 시집을 잘 간 후배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죠”
“여고시절 교육이 남편 내조와 육아에 큰 영향 끼쳐”(한인옥씨)
이회창 총재의 자택에서 부인 한인옥(44회)씨는 “별다른 일이 없는 한, 동창회에 꼬박꼬박 참여한다”고 했다.
―44회에는 유독 정치인들의 부인이 많습니다. 소속 정당도 다른데, 만나면 어떤 얘기를 하십니까.
“우연찮게도 우리 기수에 정치인 남편을 둔 친구들이 많아요. 누가 이렇게 하자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정치 얘기는 안 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버렸어요. 선거를 치를 때마다 서로 다른 당에 소속돼 있어도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정도예요. 하지만 자세히 말을 하지 않아도 비슷한 환경에 처한 친구들이 많다 보니 서로 의지가 되죠. 다른 모임에 가면 전·현직 대통령을 비난한다든가 하는 화제들이 있잖아요. 대선을 같이 치른 입장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면 난처한데, 여고 모임에서는 그런 것들이 없어요. 그냥 자식들 혼사 이야기, 상 치른 얘기, 최근에 읽은 책 얘기 같은 것들을 해요. 그런데 경기여고 졸업생들의 화제는 다른 모임과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어떻게 다른가요.
“건설적인 이야기들을 자주 한다고나 할까요. 박은혜 전 교장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을 잘 받아서 우리 스스로가 살찌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나라를 위해, 남들을 위해 모범이 돼야 한다고요. 아침마다 교가를 불렀는데, 그 내용도 나라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인지, 동창회에 나가면 사회적인 이슈들에 대한 얘기를 자주 하곤 해요.”
―1960년대 초·중반에 경기여고에 다닌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나요.
“우수한 학생의 상징이었어요. 하얀색 교복 칼라를 아침마다 빳빳하게 다려서 입고 다니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죠. 국가가 잘되기 위해서는 너희들이 똑똑하고 많이 배워야 한다는 얘기를 늘 들었어요.”
―경기여고 시절의 교육이 정치인의 부인으로서, 또 아이들을 키우는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십니까.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여학교에서는 아이들을 키울 때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가르쳤으면 좋겠어요. 한 가정의 분위기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많이 바뀌니까요. 아이들의 인성 형성에도 어머니의 역할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큰 그릇을 만들어 준다면, 어머니는 세심하게 아이들을 챙겨줄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여고시절에 배웠던 자긍심, 사회적 책임감 등이 아이들을 기르고, 내조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엘리트 그룹이다 보니,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지 않을까요.
“경기 출신들은 엘리트이기보다는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그룹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아요. 경기 출신들은 바람에 절대 휩쓸리지 않아요. 어떤 일에 대해 다같이 찬성한다거나, 모두 반대하는 일이 드물죠. 나름대로의 명분과 이유로 여러 사안들을 판단해요. 그렇기 때문에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오히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봐요. ‘그 사람은 자신의 입장과 배경이 있으니까 저러지 않을까?’하는 식으로 합리적 사고를 하게 되죠. 어떨 때에는 혜택을 받은 극소수의 사람들은 나누고, 베풀고 살아야 한다고 느끼기도 하고요. 오히려 이해의 폭이 넓다고 생각해요.”
“여고에서 배운 대로 아이들 교육시켜”(송광자씨)
조석래 전경련(및 효성그룹) 회장의 부인 송광자씨는 50회다. 송씨는 “여고 시절에 몸에 익힌 엄격한 규율을 자녀 교육에 그대로 적용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덕수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여중에 입학했을 때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몰라요. 열심히 공부해서 이곳만 졸업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경기여중ㆍ고는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최고의 학교였으니까요. 입학 후에 학교에 대해 믿음이 더 강해졌죠. 규율이 상당히 엄격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특별히 기억나는 활동이 있다면.
“스케이트, 수영, 농구 등 다양한 과목을 교과에 넣었기 때문에 사회에 나와서 생활할 때 혜택을 본 적이 많아요. 당시에 ‘수영장 25m 완주’가 체육 시험이었어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엄마는 어떻게 스케이트를 잘 타?’, ‘어떻게 수영 잘해?’하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여고 시절에 배웠으니까’라고 답했었어요. 엄마 노릇을 하는데 굉장히 플러스가 되는 활동이었다고 생각해요.”
―재계총수 집안의 안주인으로서, 엄마로서 지내는데 여고 시절 교육이 영향을 끼쳤습니까.
“여고에서 배운 대로 아이들이 규율에 충실한 생활을 하도록 가르쳤어요. 어떤 일이든 충실하게 몰입해서 해야 한다고요. 우리 집 세 아이들은 서열이 뚜렷해요. 호칭도 ‘큰형님’, ‘작은형님’이라고 깍듯하게 하고요. 여고 시절 습관이 자식 교육시키는데 영향을 끼친 거죠.”
―100년을 이어온 경기여고의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명예와 사람, 전통을 지킬 수 있는 것 등이죠.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최고의 공교육 場(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모교지만, 존경심이 드는 학교죠.”
1998년 정동에서 개포동으로 이전
경기여고는 1980년대 말, 또 다른 변혁을 경험하게 된다. 강북 정동 1번지 돌담길 끝자락에 위치한 교정을 버리고, 강남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경기여고는 1998년, 오늘날 경기여고가 자리하고 있는 서울 강남구의 개포동으로 이사했다. 이행자 전 YWCA회장은 당시 사정을 소상히 알고 있다. 이 전 회장은 당시 강남구 국회의원이었던 이태섭 전 의원의 부인이다. 그녀는 “경기여고가 이전하는데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했다.
“당시 남자 경기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 등이 강남으로 학교를 이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전과 경기여고는 달랐어요. 남자학교는 자기들이 옮긴 것이고, 우리는 학교가 미국 대사관저 옆에 있어서, 옮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강서구, 송파구에서 경기여고를 유치하려는 노력이 많았습니다.”
─강남으로 낙점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경기여고 출신들은 사실 시험을 통해 선발됐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평준화의 시대를 맞이했지만, 학교는 학부형에 따라, 학교가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청담동, 잠원동 등을 모두 둘러봤지만, 다른 지역보다 그 곳의 여건이 좋아 보여서 결정했습니다. 에피소드도 많아요”
─어떤 것입니까.
“일단 부지는 개포동으로 대략 정해졌습니다. 당시 영부인이었던 이순자씨도 여러모로 관심을 써줬어요. 특별히 나서지는 않았지만, 모교에 대한 사랑이 크다보니 관심이 컸죠. 위치는 정했는데, 학교부지가 문제였습니다. 여의도 고등학교가 5000평인데, 경기여고의 부지가 턱없이 작았습니다. 이경숙 숙대 총장, 당시 이종찬 의원의 부인 윤장순씨, 제가 여러 번 시청에 찾아가고 사정했습니다. ‘우리가 옮기고 싶어서 옮기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든 학교 부지를 마련해줘야하는 것 아니냐’고요. 시청 문에서 나오면서 처지가 어려워 울기도 여러 번 했습니다. 결국 현재의 경기여고 부지 옆에 남산운수 회사 땅까지 받아서 옮기게 됐습니다”
또 다른 100년을 기약
100 년의 역사 속에 수많은 사회 저명인사를 배출한 경기여고이지만, 일부에서는 ‘경기여고 출신들을 대하기 어렵다’고 말을 한다. ‘깐깐하다’, ‘쌀쌀맞다’는 평가한다. 졸업생들도 이 부분에 대해서 일부 공감을 하면서도, 오해가 있다고 털어놓는다. 이경숙 숙대 총장의 얘기다.
“매주 월요일 조회 때마다 ‘경기여고는 우리나라 수재의 전당’이라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엘리트 의식, 일류의식을 갖게 됐습니다. 학생들의 자부심과 긍지가 당당해 보여 그렇게 평가하는 분도 있지만, 졸업생 한 사람 한 사람은 따뜻한 품성과 섬세한 감성을 여고 시절에 키울 수 있었다는데 동의하리라 봐요.”
이영애 자유선진당 국회의원의 얘기다.
“학교 교육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각자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이었어요. 자기 책임을 완수하는데 완벽을 기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어, 필요 이상으로 남의 일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한 간섭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생활 태도가 쌀쌀맞고 깐깐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기도 하지만, 그 기본에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가 깔려 있어요.”
경기여고 100주년 기념사업회회장인 김찬숙씨는 ‘100주년 기념관’을 건립하고 있다.
김 회장은 “지난 세월 동안 경기여고가 명문이라고 회자됐던 것처럼, 이제 ‘100주년 기념관’이 인재기념관으로 대한민국 명소로 일컬어질 수 있도록 꼼꼼하게 만들겠다”고 말했다.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문영혜(47회) 경운회장의 감회는 남다르다. 문 회장의 얘기다.
“경기여고의 100주년은 입학시험을 통해 선발된 세대와 추첨으로 학교에 배정된 세대가 함께 이뤄낸 일입니다. 시험세대는 진짜 경기여고생이고, 그렇지 않은 세대는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있을 수 없죠. 시대의 변화에 맞게 경기여고가 변신을 했고, 평준화 시대 이후에도 훌륭한 후배들이 사회 각층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비추첨과 추첨 세대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경기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한 마음으로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와 함께해 온 경기여고의 100주년을 지켜보는 심정은 한마디로 감개무량하다는 것이에요. 앞으로 또 다른 100년을 보내며 대한민국의 대표 여성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학교장이 일일이 여학생을 찾아나서야 했을 만큼 열악한 상황. 초라하게 출범한 이 학당은 2년 만에 각지에서 몰려드는 학생들을 수용하지 못해 넓은 곳으로 이사를 했고, 100여 년 역사를 이어오며 걸출한 여성 인재들을 쏟아냈다. 바로 경기여자고등학교(이하 경기여고) 이야기다.
100년 동안 4만 명 동문 배출 기여고가 오는 10월,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 숙명여고ㆍ이화여고ㆍ진명여고ㆍ배화여고 는 몇 해 전에 이미 백돌을 넘겼다. 하지만 경기여고는 宣敎(선교)를 목적으로 국내에 온 외국인들이나 개인 독지가에 의해 세워진 사립학교가 아니라 ‘국내 최초의 官立(관립) 여학교’라는 점에서 100주년의 의미가 남다르다. 주영기 경기여고 교장은 “경기여고의 100년史(사)는 일제 강점기, 해방, 정부수립, 국토분단, 6ㆍ25 전쟁 등 대한민국 격동의 파노라마를 그대로 담고 있다”고 회고했다.
경기여고가 주목 받는 이유는 100년 역사뿐만이 아니라 각계 각층에 수많은 유명 인사들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경기여고는 약 4만 명의 여성 인재를 배출했는데, 그중에는 법조계(판ㆍ검ㆍ변호사) 인사 30여 명, 국회의원 및 장관 30여 명, 100여명의 문화 예술계 저명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의료계 및 학계 인사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동문회 측은 어림잡아 1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특히 경기여고는 이 땅의 수많은 政界(정계)ㆍ財界(재계)ㆍ學界(학계)의 안주인들을 배출했다. 경기여고의 인맥도는 오늘날 대한민국 권력지도와 거의 비슷하다.
경기여고 내에서도 63회 졸업생(1975년 졸업)은 사회적인 지명도가 높은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특별한 기수로 꼽힌다.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여성 법무부 장관을 지냈던 康錦實(강금실) 前 장관, 국내 최초의 여성 대법관인 金英蘭(김영란) 대법관, 검사 출신 3選(선) 의원인 趙培淑(조배숙) 민주당 국회의원이 63회다. 줄기세포 논란이 일 때 黃禹錫(황우석) 교수에 대한 중간조사결과를 발표했던 노정혜 서울대 교수, 설치미술가인 양주혜 홍익대 교수, 독일ㆍ미국 등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화가 이민주씨, 한나라당 金武星(김무성) 의원의 부인 최양옥씨, 바이올리니스트이며 朴振(박진) 한나라당 의원의 부인인 조윤희씨,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리는 장영주의 어머니 이명준씨도 동기다.
경기여고 63회
63회 동문회 前(전) 대표였던 김미애씨는 “63회가 특별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63회는 ‘중학교 뺑뺑이 1세대’입니다. 이전의 기수는 경기여중 출신이 대부분 경기여고를 갔지만, 63회는 전국 각지의 중학생들이 경기여고에 입학하기 위해 시험을 치뤘어요. 경쟁이 치열했죠. 중학교 시절에는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기고만장했는데, 막상 경기여고에 들어와 보니 자신보다 뛰어난 학생들이 엄청났어요. 여기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쳤는데, 이것이 사회진출을 부추긴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윤정로 카이스트 교수는 63회가 졸업했던 시기의 사회 분위기가 한몫을 했다는 평가를 내놨다.
“63기 졸업생들이 사회로 진출했던 1980년은 여성들의 사회참여에 대한 열망과 기회가 가장 많았던 시기였어요. 뛰어난 여성들에게 기회가 주어졌고, 그러다 보니 안주인 지위에 만족했던 경기여고 동문들 중 본인이 직접 사회활동에 나서는 기회가 많았다고 봅니다.”
경기여고 63회 졸업생은 결속력이 남다르다. 6월 정기총회, 12월 송년모임, 10월 동창의 날 행사는 물론, 기총회·기독교 모임·등산팀·댄스 모임 등 소모임 활동도 활발하다. ‘63회 法曹(법조) 3인방’으로 불리는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김영란 대법관, 검사 출신인 조배숙 의원 등은 동기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다고 한다. 63회 동문회 전 대표는 “졸업 30주년 기념식이 끝난 후 63회 동기생 100여 명이 단체로 해외여행을 떠났다”고 말했다.
63회가 특별하다고 하면, 섭섭해할 기수는 부지기수다. 그만큼 경기여고에는 사회활동이 활발한 동문들이 많다. 먼저 정계의 경기여고 人脈(인맥)을 들여다보자.
경기여고 출신 現 국회의원 3인방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43회) |
17대 국회에는 경기여고 출신이 더 많아 김명자(50회), 김애실(53회), 이계경(57회), 이은영(57회), 홍미영(62회), 이경숙(60회) 전 의원 등이 국회에 진출했다. 숙명여대 총장 李慶淑(이경숙)씨와 同名(동명)인 이경숙 의원은 여성운동가이자 崔圭成(최규성) 민주당 의원 부인으로, 17대 때 나란히 당선돼 ‘부부 국회의원’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이계경씨는 ‘여성신문’을 창간한 여성운동가다.
경기여고 졸업생들의 정치 활동 역사는 약 7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성 정치인이 全無(전무)하다시피 했던 시절부터 경기여고 출신들의 정계진출은 전통처럼 이어졌다. 이 학교 출신 중 가장 먼저 정계에 진출한 사람은 故(고) 片貞姬(편정희ㆍ26회) 전 독립유공자미망인회장. 1915년생인 편 회장은 1952년 在日(재일) 대한부인회 상임고문을 시작으로 정치활동을 시작, 1971~1972년 제8대 공화당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이후 국제부인회총연합회 한국본부 회장, 대한노인회 이사 등으로 활동했다.
조배숙 민주당 의원(63회) |
제10대 국회에도 현기순(유정회ㆍ26회), 김옥렬(유정회ㆍ36회)씨가 진출해 활동했다. 李明博(이명박)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이경숙(49회)씨는 제11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변호사 황산성(민한당ㆍ51회)씨도 이경숙씨와 함께 국회 활동을 했다. 41회 졸업생인 김장숙씨는 12, 13대 민정당 국회의원, 30회 졸업생인 이우정씨는 제14대 민주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애경그룹 회장 장영신(43회)씨는 제16대 국회의원, 학자 출신인 허운나(55회)씨는 제1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국회의원은 아니지만, 노미혜(50회)씨가 現(현) 한나라당 여성위원회 부위원장, 이금라(58회)씨가 現 서울시의회 의원, 신혜경(61회)씨가 現 청와대 대통령실 경제수석실 국토해양비서관, 박희성(62회)씨가 現 서울시의회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경기여고 출신 장관들
강금실 前 장관 |
재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성 경영인 중에 경기여고 인맥이 많다. 경기여고 43회로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장영신씨는 현재 애경그룹을 이끌고 있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장 회장은 1972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남편 채몽인씨의 뒤를 이어 애경유지공업 경영을 맡게 됐다. 그녀는 이후 30여 년 만에 이 회사를 16개 계열사에 연 1조60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그룹으로 일궈냈다. 장 회장은 철탑산업훈장(1981년), 1억불 수출탑(1991년), 국민훈장 은탑산업훈장(1995년) 등을 수상, 여성 경영인으로 존경 받고 있다.
남편의 뒤를 이어 기업 경영에 뛰어든 사례로는 현정은(60회) 현대그룹 회장이 꼽힌다. 현 회장은 지난 2003년, 갑작스럽게 타계한 고 鄭夢憲(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의 뒤를 이어 현대그룹을 경영하고 있다. 그녀는 2007년, 美(미) <월스트리트 저널>이 선정한 ‘주목할 만한 여성 50인’에 선정됐다.
삼성그룹 창업주 고 李秉喆(이병철) 회장의 맏손녀이자 CJ그룹 계열사인 CJ엔터테인먼트 이미경 부회장은 경기여고 65회다.
李健熙(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부인이자,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으로서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이고 있는 洪羅喜(홍라희)씨는 경기여고 51회다.
강기원 변호사 |
경기여고 출신의 법조계 진출은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제18대 국회의원 이영애(55회)씨는 법무법인 ‘바른’의 고문 변호사다. 이씨는 여성 최초로 사법고시에 수석합격(제13회)해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최초의 여성 고등법원 부장판사(1995년), 최초의 여성 법원장(춘천지방법원ㆍ2004년), 최초의 여성 사법연수원 교수 등 ‘최초’ 타이틀을 휩쓸었다.
경기여고의 이런 법조 전통은 전수안(59회) 대법원 대법관, 김영란(63회) 대법원 대법관, 강금실(63회) 변호사, 청와대 민정수석실 법무비서관을 지냈던 황덕남(64회) 세계종합법무법인 변호사로 이어졌다.
경기여고의 법조인 배출은 평준화 세대인 ‘뺑뺑이 세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김은주 법률사무소 변호사 김은주(79회)씨, 김정민(80회) 수원지방법원 판사, 이윤조(80회) 김&장 변호사, 김희진(86회) 서울서부지법 판사, 반지(88회) 서울남부지검 검사 등이 법조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국가가 어찌 여자 교육을 중요시하지 않겠는가”(순종의 비가 내린 徽旨)
경기여고의 시작은 19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은 1908년, 칙령으로 최초의 관립고등여학교 설립을 허가했다. 경기여고의 전신이다. 순종의 비인 孝(효) 황후는 학교를 설립하면서 임금을 대신해 徽旨(휘지)를 내렸다.
<대개 보통교육은 남녀의 구별이 없으니, 여자는 출가해서는 남편을 돕고 가정을 다스리며 어머니가 되어서는 자녀를 부육하는 책임을 지고 항상 가정의 주인이 되어 일가의 행복을 증진하고 이를 추진하여 국운을 裨補(비보)함이 또한 클지니 국가가 어찌 여자교육을 중요시하지 않겠는가. 내가 친히 스승을 맞아 교육을 받았으며, 일반 여자로 하여금 나를 표준케 하기를 기하더니 이제 정부가 고등여학교를 한성에 창설함은 실로 나의 뜻을 이룸이라(중략).>
이렇게 하여, 한성고등여학교라는 이름으로 종로구 당주동에 있는 조그만 한옥 마을에 세워졌다. 한성고등여학교는 4년제, 총 150여명의 학생을 수용할 생각이었지만 초창기에 학생 모집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경기여고 100년史를 집필하고 있는 47회 졸업생 민숙현씨의 설명이다.
“구한말 시기에 서민들은 먹고살기 어려워 교육을 시킬 생각을 하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여성의 신교육에 대한 호응이 당연히 낮았죠. 초대 교장이었던 어윤적씨가 내각 관료, 고관부인 등을 찾아다니며 학생 모집에 직접 나섰다고 합니다. 첫해에 학생이 50명이 채 되지 않았어요. 학생 모집이 어려웠고, 모인 학생들 중에 시험 성적이 나쁜 사람들은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요. 開校(개교) 첫해부터 일정 수준 이상의 지식을 갖춘, 집안이 좋은 학생들만 고른 겁니다. 신식문화에 동의하는 수준 있는 집안의 자제들이 한성고등여학교로 속속 모였습니다”
―학교가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걸렸습니까.
“2년이 채 되지 않아 학교가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1910년도에는 종로구 당주동 한옥에 더 이상 학생들을 수용하기 어려워 경운동(현재의 천도교 수운회관)에 새 부지를 마련하고 현대식 건물을 지어야 할 정도였죠.”
―어떻게 그렇게 빠른 시간에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까.
“‘한성고등여학교는 특별한 학교’라는 인식이 급속하게 퍼졌다고 합니다. 과거 학교의 역사를 찾아보면 ‘대갓집에서 한성고등여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을 며느리로 맞기 위해 교문 앞에 줄을 섰다’는 내용이 나올 정도입니다.”
―학생들의 수준은 어땠습니까.
“향학열이 컸다고 해요. ‘학교’라는 새로운 환경을 접한 여학생들은 악착같이 공부를 했죠. 과거의 사료를 보면, 한성고등여학교에 ‘누에를 먹으면 공부를 잘한다는 소문이 퍼져, 학생들이 누에를 씹어 먹으며 공부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정부의 지원도 한몫 했습니다. 등록금을 일절 받지 않았고, 학생들의 공부에 필요한 지필묵을 모두 지원해 줄 정도로 재정적 지원이 컸습니다.”
민숙현씨의 설명에 따르면 한일합방 직후 1회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교직에 채용되는 등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앞에서 기념사진 촬영한 경기여고생들(1967년). |
일제 통치下의 경기여고
개교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은 1910년, 경기여고는 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당시 여자는 바깥출입의 자유가 없었고, 어쩌다 외출이라고 하려면 너울과 장옥으로 얼굴을 가리고 긴 치마를 입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초기교장이었던 어윤적씨는 긴 치마 전통 한복을 짧게 개량하고, 위ㆍ아래를 검정 옷감으로 통일시켰다. 여학생들에게 공부만 시킨 것은 아니었다. 한성고등여학교는 학생들에게 뜀뛰기와 달리기, 공치기, 줄넘기를 가르쳤다. <경기여고 80년사>에 따르면 한성고등여학교의 이 같은 방침은 완고한 보수층으로부터 지탄을 받았다고 한다.
한성고등여학교는 1911년, 경성여자보통학교로 개칭했다. 일제 치하였기 때문에 경기여고도 일본인 교장을 맞게 됐다. 1913년 오타 히데오(太田秀雄)이라는 일본인이 교장으로 취임했고, 이후 경기여고는 3대에 걸쳐 일본인이 교장을 맡았다. 1938년 당시 학교 이름을 경성고등여학교로 바꿨다.
경기여고 32회 졸업생으로 이 학교 동창회장을 지냈던 이혜자씨는 과거 청량리정신병원장을 지낸 고 최신해 박사의 부인이다. 이씨는 일제 치하였던 1938~1942년 경기여고(당시 경기高女)를 다녔다. 이씨의 회고다.
“일본 선생 20여 명, 한국인 선생 5명이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국어시간에는 ‘일본어’를 배웠고, 교내에서 학생들끼리 한국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등 감시가 심했어요. 우울한 시기였지만 일본 선생들로부터 무시 받고 자란 기억은 없어요. 일본 선생들 사이에서도 이 학교(경기高女)는 ‘빈틈없는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라고 소문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일본 교사들이 수업 시간에 입버릇처럼 ‘너희들처럼 총명한 아이들을 본 적이 없다’고 얘기하곤 했어요.”
―당시 경기高女(고녀)만의 특별한 학풍이 있었습니까.
“항상 노트 정리를 철저히 하라고 훈련 받았습니다. 노트 정리를 열심히 하다 보니, 정돈된 사고방식을 가질 수 있었어요. 한국 선생들은 학생들에게 늘 ‘당당하게 살아라’ 하고 말씀하셨어요. 손정규 가사 선생(1회 졸업생)은 ‘일본 사람 앞에서 쭈뼛하지 말아라. 식민지 근성을 가질 필요도 없다. 수업시간에 일본인이 대체 왜 우리를 못살게 구는 것이냐는 질문을 해도 괜찮다’고 수업 시간에 말했습니다. 손 선생의 그런 말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는 ‘당당하게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경기고녀에 입학하기는 어땠나요.
“그때는 1차와 2차 고녀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1차는 경기-숙명-진명-여상 순이었고, 2차는 동덕-이화-배화-상명 순이었어요. 저는 마포에 있는 용강국민학교를 졸업했는데, 한 학교에서 평균 두 명 정도가 경기고녀에 입학했어요. 경쟁률이 3대 1 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 학년에 삼수를 해서 경기고녀에 입학한 학생이 있었어요.”
학교 규율 엄격
노라노 패션 디자이너 |
“초등학교 2학년 때 한글 교육이 없어졌습니다. 국어로 일어를 사용하던 시절이었죠. 경기 고녀는 공립학교였으니 오죽했겠습니까. 하지만 일본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했어요. 학대를 받거나, 무시당했던 기억도 없습니다. 다만 독립운동가의 자녀, 사상가의 딸들을 학교에서 감시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어떤 과목을 배웠습니까.
“국어, 수학, 역사, 과학, 음악, 미술 등 다양하게 공부했어요. 입학 당시에는 영어교육이 있었는데, 2학년 올라가면서 없어졌어요.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하던 시기여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일본 사상을 공부하는 ‘公民’(공민) 시간이 있었어요. 한국 선생이 ‘다케시마’라고 창씨하고 그 과목을 가르쳤는데, 어린 마음에 당돌하게 제가 ‘왜 우리가 창씨개명을 해야 하느냐’고 따지듯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정규 수업 이외에 하루에 2시간씩 교련 수업을 받았어요.”
―학교 규율이 엄했나요.
“엄하기는 했지만, 선생들은 대부분 융통성이 있었어요. 수업 시간 중에 ‘일본 예법’이라고, 두 시간씩 무릎을 꿇고 앉아 일본 茶道(다도) 등을 배우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수업이 듣기 싫어서 무릎에 붕대 감고 꾀병을 내서, 수업시간에 다리를 뻗곤 했지만 엄하게 혼났던 기억은 없습니다.”
미술에 소질이 있었던 그녀는 하루는 수업시간에 과제를 일찍 끝내고 엉뚱한 그림을 그렸단다. 스케치북 한가운데에 교장 선생의 얼굴을 그려놓고, 주위에 아부하는 선생들의 표정을 실감 있게 그려놓은 것이다. 미술 선생은 이를 보고 혼내기는커녕, 껄껄 웃고 지나쳤다고 한다.
문학ㆍ예체능계에서 두각
졸업생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두 가지 사실이 나타난다. 경기여고가 개교한 이후 빠르게 명문 학교로서의 입지를 굳혔다는 점과, 당시 공부를 잘하던 여학생들이 대거 이 학교에 입학했다는 점이다. 경기여고는 ‘여성 교육에 앞장선다’는 개교 취지에 맞게, 굵직한 여성학자들을 배출했다.
조옥라(57회)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와 장필화(58회)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 등이다.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는 조옥라씨는 1982년 학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줄곧 여성과 역사, 가부장제에 대한 고찰 등을 통해 여성학을 발전시켰다. 한국여성학회장을 역임했고, 지난 2005년에는 제9차 세계여성학대회를 서울에 유치해 관심을 끌었다. 장필화씨는 현재 여성부 정책자문위원, 서울시 여성위원회 부위원장, 아시아여성학회 초대회장 등을 맡아 업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국내의 대표적 여성학자다. ‘변화하는 여성문화, 움직이는 지구촌’이라는 저서를 발간한 그녀는 2004년 녹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경기여고 출신들이 공부에만 소질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문학계, 예체능계에서도 경기여고 출신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경기여고 文人(문인)의 시작은 원로 문인인 고 강신재씨로부터 시작된다. 32회 졸업생인 강씨는 6ㆍ25 전쟁 이후 한국문단에서 남녀 사이의 현대적 애정 모럴을 추구한 젊은 여성작가였다. 그녀의 1960년 작 ‘젊은 느티나무’는 이복 오빠와 누이의 사랑을 담은 이야기로 당시 문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여류문학상(1963년), 보관문화훈장(1993년) 등을 수상했다.
<월간문학>으로 등단해 ‘산집인생’, ‘억새풀의 노래’, ‘사랑의 허상’ 등의 소설을 집필한 윤남경씨는 37회. ‘요절한 천재작가’로 불리는 고 전혜린(40회)씨도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그녀는 스물다섯의 나이에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서울대 강단에 섰고, 이화여대·성균관대 조교수 등을 역임했으나 서른두 살에 자살했다. 여류 법철학자이자 독일문학가였던 그녀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자전적 수필집을 남기고 떠났다.
‘영인문학관장’ 강인숙씨와 이어령 前 장관 부부. |
강은교(52회) 동아대 한국어문학부 교수는 1968년 사상계에 등단,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시인이 시인에게 물었네> 라는 제목의 시집을 발간했다.
서강대 프랑스문화전공 교수인 최윤씨는 60회다. 그녀는 1988년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라는 단편 소설을 발간한 뒤 1990년대에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2005년에 <첫 만남>이라는 소설집을 발간했다.
문학 평론가이자 현재 영인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는 강인숙(40회)씨, 서양화가이자 시인인 방혜자(44회)씨, 중앙일보 신춘문예소설 ‘쓰러지는 빛’으로 데뷔한 희곡작가 최명희(52회)씨, 서양화가 홍정희(52회)씨, 살집이 넉넉한 테라코타 여인상으로 유명한 도예가 한애규(60회)씨 등도 경기여고 출신이다.
김혜자, 양희은, ‘자우림’의 김윤아, 박선영 등 연예계 진출
탤런트 김혜자씨(48회) |
‘한국의 어머니’라는 수식어를 얻고 있는 배우 김혜자씨는 48회 졸업생이다. MBC드라마 ‘전원일기’, KBS 주말연속극 ‘엄마가 뿔났다’등에 출연한 김씨는 연기 생활뿐 아니라,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꾸준히 봉사활동을 펼쳐 화제가 됐다. 그녀는 학교를 빛낸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 ‘자랑스런 경기인상’을 받았다.
1971년 ‘아침이슬’이라는 노래로 데뷔해 포크가수로 맹활약하고 있는 양희은(58회)씨도 경기여고 출신이다. 양씨는 ‘한계령’, ‘내 나이 마흔살에는’, ‘한사람’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그 외에도 ‘우리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영화를 찍은 배우 김지영(81회)씨, 록밴드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81회)씨, 한국슈퍼모델선발대회 1위 출신의 모델 주정은(83회)씨, KBS 슈퍼탤런트 대상 출신으로 드라마 ‘겨울새’의 여주인이었던 박선영(83회)씨, KBS 슈퍼탤런트 19기 출신의 탤런트 배민희(86회)씨 등이 경기여고 동문이다.
패션계의 한 획을 그었던 인물들도 많다. 1956년 한국 최초로 패션쇼를 열었던 노라노씨는 34회. 노씨는 이후에 한국 최초의 기성복 패션쇼(1966년), 파리 프레타포르테 패션쇼 참가(1973년) 등의 기록을 세웠고, 윤복희의 미니 스커트를 제작해 화제를 끌었다. 그녀는 故 陸英修(육영수) 여사 등 영부인의 의상을 담당했고, 여든이 넘은 현재까지 패션 디자이너로 맹활약 중이다.
박윤정(39회)씨는 패션스쿨로 유명한 프랑스의 ‘에스모드’분교를 서울에 유치해 디자이너를 양성했다. ‘한국 패션계의 大母(대모)’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디자이너 이신우(48회)씨는 경기여고 출신이다. ‘오리지날 리’라는 브랜드를 탄생시킨 그녀는 외환위기 당시 회사가 부도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지난 2006년 ‘SFAA 서울 컬렉션’ 오프닝 무대에 서면서 재기했다.
외국에서 ‘한국’을 떠올리면 전쟁의 이미지로 자욱했던 1960년대에 세계적인 무대에서 한국의 미를 알렸던 여성이 있다. 경기여고 46회 오현주씨다. 오씨는 미스코리아 眞(진)으로 선발돼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참가, 인기상·스피치상·스포츠맨십상 등 세 개를 안고 왔다. 그녀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눈독을 들였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
일간스포츠 기자 출신으로 청소년전통예술단 ‘새울림’ 단장인 구희서(45회)씨, 국립중앙극장장이자, 신기남 전 통합민주신당 국회의원의 누나인 신선희(52회)씨와 김방옥(58회)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장은 경기여고 출신의 연극계 3인방이다.
서울 음대 재학 중에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떠나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용희(54회)씨는 남편 이대욱씨와 함께 ‘부부 피아니스트’로 유명하다.
공부 잘하기로 유명한 경기여고 출신들이 연예계에까지 진출한 데에는 학창 시절의 자유로운 학풍이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동문들이 갖고 있는 여고시절의 추억은 공부를 했던 기억보다는 ‘즐거웠던 특별활동과 체육’이었다.
“학교 신문 <매순>을 만든다고 수업 땡땡이”(김영란 대법관)
김영란 대법관(63회) |
“동기였던 강금실 전 장관은 3년 내내 우등상을 받는 등 모범생이었는데, 저는 엉뚱한 구석이 많고 자유분방한 편이었어요. 체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체육수업시간마다 주번을 자청해 교실에 남았다가 선생님께 혼났던 기억이 선합니다. 1년에 4번씩 발간되는 <매순>이라는 학교 신문이 있었는데, 기사 쓴다는 핑계로 수업을 빼먹은 적도 여러 번이고요. 정해진 틀 속에 생활하는 것을 싫어하는 반항기질이 있었죠.”
―경기여고는 엄격했다고 들었는데, 학창 시절에 재미없으셨겠네요.
“엄격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공부 이외의 과외 활동을 참 많이 했습니다. 봄 가을이면 비원에 가서 사생대회, 글짓기, 사진촬영 중 하나를 선택해서 활동했고요. 교양독서를 읽고 시합을 치르는 ‘자유교양대회’라는 것이 있었는데, 학교에서 학생들의 참가를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첫해에 지구별 대회에서 1등을 한 뒤 다음해에 참가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선생님들이 저를 붙잡으러 오신 적도 있어요.”
―여고시절 가장 기억이 남는 점이 있다면.
“‘민속무용의 날’이 기억에 남습니다. 학급별로 나라를 지정해서, 그 나라의 민속춤을 추는 행사였습니다. 저희는 ‘그리스’를 맡았는데, 어떻게 춤을 표현할까 싶어 그리스를 주제로 한 영화를 보고, 의상을 제작하고 분주하게 지냈어요. 공연 당일 날, 학생들의 부모만 들여보내고 남학생은 절대 보내지 않았을 정도로 엄격했죠. 한번은 신문반 선배들과 부산에 갔다가 우연히 남학생들을 만나서 빵집에 앉게 됐는데, 그것이 적발돼 혼이 난 적도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위원장 출신이자, 숙명여대 4選(선) 총장인 이경숙씨도 비슷한 추억을 갖고 있다.
“경기여고는 성적만 강조한 학교가 아니었어요. 다방면의 특별활동을 지원하는 학교였습니다. 저는 여고시절 육상 학교 대표선수로 발탁되어 전국중등학교 육상대회에서 우승했어요. 늘 여고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가장 즐거웠던 기억이 그것입니다. 또 의장대 활동한 것, 학교 축제 때 연극무대에 서서 여러 인생을 잠깐이나마 살아봤던 추억이 남아있습니다.”
李會昌(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의 부인 한인옥씨의 얘기다(한씨는 1953~56년에 경기여고를 다녔다).
“당시에 경기여고가 농구를 참 잘했어요. 경기여고와 숙명여고의 농구경기는 빅 매치였어요. 제 언니가 숙명여고를 다녔는데, 경기가 있는 날에 심하게 언쟁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 날에는 밥을 먹을 때도 둘이 멀리 떨어져서 먹곤 했죠. 경기여고 농구팀 경기가 제 학창 시절의 소중한 추억이에요. 체육시간에 ‘블루머’라는 짧은 체육복을 입었는데, 체육시간만 되면 이걸 입기가 참 창피했던 기억도 나고요. 요즘은 미니스커트를 입지만, 당시에는 정말 파격적이었거든요.”
한인옥·현정은씨의 추억
현정은 현대그룹회장(60회) |
조선일보 부국장을 지냈던 윤호미(48회)씨는 “고3 때 열렸던 전교 연극경연대회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우리 3학년 2반은 당대의 문제 작가 오상원의 단편 ‘잔상’을 연극 참가작품으로 골라 공연을 했다. 대학입시를 눈앞에 뒀지만, 저녁마다 밤늦게 모여 연습을 했다. 여고생이었던 우리는 당돌하게도 원작자 오상원씨를 찾아가 저작권 양해를 구하고, 당시 인기스타였던 KBS 임택근 아나운서, 인기 절정의 유머작가 조흔파씨를 찾아가 우리반 연극지도를 해달라고 떼를 썼다. 두 분은 흔쾌히 지도를 해주겠다며 승낙했다”고 기억했다.
서울대 약학대 교수이자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인 김영중(52회)씨는 “학교가 全人(전인)교육을 시키려고 무던히 애를 섰다. 공부는 물론 여름에는 수영, 겨울에는 스케이트, 봄가을에는 사생대회, 전교생이 참여하는 반 대항 합창대회, 포크 댄스대회, 음식이나 도넛 만들기까지 고루 익히게 했다”고 말했다.
경기여고 가족 많아
경기여고 100년사를 취재하면서 특이한 점 중 하나는 한 가족 안에 경기여고를 나온 사례가 유독 많다는 사실이었다. 당대 최고의 학교였던 만큼, 자녀를 같은 학교에 보내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해 동문의 날에는 여러 자매가 경기여고를 나온 집안에 대한 표창이 있었다. 동문 3, 4자매 ‘경기가족상’이었는데, 무려 223가족이 수상을 했다. 소설가 박완서씨가 경기여고 3 자매를 키운 어머니로 표창을 받았고, 정운찬 前 서울대 총장 부인 최선주(57회)씨 3자매, 가수 이미배(57회)씨 3자매가 수상했다. 올해 동문의 날에는 2대에 걸쳐 5母女(모녀) 이상의 경기여고 출신을 가진 집안에 대해 표창할 예정이라고 한다.
김상협 前 국무총리 집안은 부인 김인숙(31회)씨 외에 세 딸과 며느리 등 2代에 걸쳐 이 학교 출신이 33명이다.
제9대 재무부 장관과 수출입은행장을 역임한 宋仁相(송인상) 효성그룹 고문의 집안은 2대에 걸쳐 다섯 모녀가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송 고문의 부인인 최연순(23회)씨를 비롯해 네 명의 딸 원자(46회), 길자(48회), 광자(50회), 진주(52회)씨가 모두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송광자씨는 대한적십자사 여성봉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부인이다.
삼성家(가)에는 경기여고 출신이 다섯 명이다. 삼성리움관장이자 이건희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51회)씨를 비롯, 고 이병철 삼성그룹 명예회장의 맏며느리인 손복남(40회)씨, CJ엔터테인먼트 부회장이자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누나인 이미경(65회)씨, ‘아름지기’ 이사장이자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부인 신연균(58회)씨, 홍석규 보광그룹 회장 부인 이계명(62회)씨 등이 경기여고 선후배 지간이다.
경기여고 동창회장을 맡았던 이혜자(32회)씨도 경기여고 가족이다. 이씨의 동생으로 서울대 가정대학장을 지낸 혜수(34회)씨, 미국에 거주 중인 혜선(35회)씨와 혜경(41회)씨, 인하大 교수인 혜영(41씨)가 경기여고 선후배지간이다. 세 딸 중 최은희(53회)씨, 최은미(66회)씨, 며느리 윤난지(60회) 이화여대 교수와 임인경(60회) 아주대 교수도 동문이다. 그녀는 “같은 조건이면 경기여고 출신의 며느리를 보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2대에 걸쳐 9명의 동문을 배출한 이혜자씨 가족사진. |
“여고 선생님들 덕분에 예민한 시절 잘 넘겨”(홍라희 삼성리움관장)
홍라희 삼성리움미술관장(51회) |
“여고를 다니던 때 4ㆍ19가 일어나서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홍 관장의 부친 洪璡基씨는 4ㆍ19 후, 제1공화국 내각에 참여하여 부정선거를 한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편집자 주). 심리적으로 너무나 지치고 힘든 시기인 데다, 사춘기여서 예민하기도 했어요. 이런 상황을 잘 넘길 수 있도록 배려해준 것은 여고 선생님과 동기들이었어요. 선생님들이 제가 열등감 없이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도록 많은 격려를 해주셨어요.”
―학창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박은혜 교장(제8대 교장)선생님이 조회 때마다 단아한 모습으로 단상에 올라가 얘기하시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해요. 박 교장 선생님은 늘 우리들한테 ‘너희는 잘할 수 있다. 여자들도 남자 못지않게 잘할 수 있어’라고 말씀하셨어요. 박 교장님의 얘기를 듣다 보면, ‘아, 난 정말 잘할 수 있나 보다’ 하는 자긍심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요즘 여고 때 동창들을 만나보면 여전히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요. 당시에는 여성이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가 아니어서, 사회 활동을 하지 않은 친구들이 많았죠. 그 친구들의 死藏(사장)된 능력이 너무 아깝고 안타깝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가끔 경기여고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안타깝고요.”
―어떤 식의 오해 말이죠.
“간혹 경기여고 출신들이 남을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인 양 오해를 받곤 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 오해를 받을 때마다 섭섭해요.”
“진리를 추구하고 그것을 수호하는 용기”(이영애 국회의원)
이영애 자유선진당의원(55회) |
“경기여고는 전통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거의 단조롭기까지 한 생활의 연속이었어요. 잘 훈련된 병사들이 모인 병영 같은 모습이랄까요? 하지만 1년에 한 번 있는 합창대회, 민속무용 경영대회는 개인적인 영역을 벗어나 다 같이 협력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일이었죠. 이런 활동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생활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흡수된 고도의 훈련이라고나 할까요. 개인과 단체를 교묘하게 조화시키는 교육 방법을 당시에 시행했다는 것이 경기여고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고시절의 교육이 이 의원께서 진로를 결정할 때 영향을 끼쳤습니까.
“스스로 책임지고, 자기가 중요 사안을 선택해야 한다는 용기는 경기여고 다닐 때에 받았던 교육이었습니다. 저는 외조부와 부친이 법조인이어서, 어린 시절부터 법조인이 매력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원래 법대를 가려고 했는데, 당시 사회 분위기는 여자가 법학을 전공하는 것에 대해 기이하게 생각하는 면이 좀 있었어요. 부모님도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행복한 여성의 삶이라고 생각하시는 편이었죠. 결국 부모님의 권유로 서울대 영문과에 갔지만, 2학년 때 전공을 바꿨습니다. 문학도 재미있었지만, 현실세계에서 가치를 구현하는 법조인이 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금 생각해도 그때 올바른 결단을 내렸다고 생각해요. 勇斷(용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경기여고의 교육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 여학교 시절의 교육이 법조인으로서 생활하는데 어떤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세요.
“‘여자가 희귀한 법조계에서 살아남기 힘들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때마다 항상 프라이드를 가지라는 경기여고의 유언무언의 교육과 전통이 어려운 환경을 두려움 없이 헤쳐나간 힘이 됐다고 얘기하곤 합니다. 명예 감정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기 때문에 항상 自重自愛(자중자애)하게 됩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바른 길을 걸으려고 노력하고요. 이 가르침은 여고가 제게 준 가장 큰 선물이자 은혜라고 생각해요. 제가 보기에 경기여고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프라이드’입니다. 정신은 진리를 추구하고 그것을 수호하는 용기고요. 옳지 않은 일에 분명히 반대하고 옳은 일은 수행해 나가는 것이 제가 커리어를 유지하면서 한시도 잊지 않은 정신입니다.”
“여고 선생님들 보며 교육자의 꿈 키워”(이경숙 숙대 총장)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49회) |
이 총장의 얘기다.
“여고 시절에 선생님들의 성실하고 책임감 넘치는 모습을 보면서, 학생들을 양육하고 돌보는 교육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가르쳐준 내용이나 얘기를 들으면서 가보지 못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던 것 같고요. 선생님들과 얘기를 주고받으며 배운 수업시간이 제 창의력과 지적 탐구력을 계발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경기여고 학생들의 이미지는 어땠나요.
“경기여고생들은 늘 정갈하고 단정한 이미지였어요.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주도적이었던 태도도 떠오르고요. 校歌(교가) 중에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워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이 경기의 정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성과 의지와 감성에 있어 균형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죠.”
학·의료계에는 경기여고 출신 인사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개교 100주년을 맞아 사회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동문 명단을 찾아내면서, 윤정로 카이스트 교수가 가장 고심했던 대목 중 하나다.
윤 교수는 “경기 출신 중에 학계로 진출한 사람이 워낙 많아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사람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파악된 인원만 해도 어림잡아 1000명이 넘는다.
경기여고 출신 중 최초로 대학 총장을 했던 사람은 故 고황경(14회) 서울여대 명예총장이다. 1909년생인 故 총장은 경기여고 졸업 후 1920년대에 일본 도시샤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渡美(도미), 1937년 미시간대학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던 신식 여성이었다. 그녀는 경기여고 교장(1945~1946년)을 지낸 뒤 다시 미국으로 떠나 프린스턴대와 컬럼비아대에서 인구문제를 연구했다. 1950년대에는 영국유엔협회 주최로 한국, 아세아와 국제문제에 대해 800여 차례 강연을 했다. 고 총장은 서울여대를 설립하여 24년 동안 총장을 역임했다. 그녀는 이외에도 15차 UN총회 한국대표·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경기여고 출신 교육계의 별들
故 조기홍(14회)씨는 1982년부터 성신여대 총장을 지냈고, 36회 김옥렬씨는 1981~1989년 숙명여대 총장을 지냈다. 김 전 총장은 1967년 미 브린마워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은 후 1958년부터 숙명여대 강단에 섰다. 그녀는 국무총리실 여성정책위원, 통일고문회의 고문, 국제정치학회장 등을 역임했고, 현재 한미협회·호암재단 등 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경숙 숙대 총장은 학계를 대표하는 경기여고 출신 인사다. 경기여고를 졸업한 후 숙명여대 수석입학ㆍ수석졸업을 한 그녀는 미 사우스캐롤라이나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및 비교정치학을 전공했다. 이 총장은 1994년부터 15년 째 숙명여대(제13~16대 총장)를 이끌어 오고 있다. 16대 국회의원을 지낸 허운나(55회)씨는 2004~2006년 한국정보통신대학 총장을 지냈고, 49회 유의경씨는 세종대 부총장을 지냈다.
경기여고 출신의 교육계 진출은 1960년 이후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현기순(26회) 서울대 명예교수, 나복영(31회) 고려대 명예교수, 이기원(37회) 서울대 명예교수, 김인자(39회) 서강대 명예교수 겸 한국심리상담 연구소장, 이수재(40회) 이화여대 명예교수, 허영자(45회) 성신여대 교수, 박수연(46회) 이화여대 교수, 한용봉(47회) 고려대 명예교수, 이기춘(49회) 서울대 교수, 이온죽(51회) 서울대 교수, 김미경(52회) 이화여대 교수, 백명현(55회) 서울대 화학과 교수, 윤정로(61회) 카이스트 교수 등이 있다.
의료계에도 경기여고 출신이 즐비하다. 한국희귀질환연맹을 창립한 김현주(49회) 前 아주대 의대 교수, 서울대 약학과 교수인 김영중(52회)씨, 이화여대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인 서현숙(55회)씨, 연세대 방사선종양학교실 교수 서창옥(59회)씨, 강동병원장인 이혜란(60회)씨, 아주의과대학장 임인경(60회)씨, 한의사 이유명호(60회), 서울의대 교수인 안규리(61회)씨 등이 경기여고를 나왔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논란 당시 화제에 올랐던 안규리 교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진료소인 ‘라파엘의 집’도 운영하고 있다. 각양각색의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경기여고 출신 학계 사람들의 열거는 지면상 줄인다.
언론인, 방송인도 다수 배출
경기여고 50~70회 졸업생 중에 언론, 방송계로 진출한 사람도 여럿이다. 44회 임국희씨는 학교의 자랑 중 하나다. 임씨는 1961년 KBS 아나운서를 시작으로 MBC, 서울방송, 교통방송 등에서 아나운서로 활약했다. 그녀의 프로그램 중 MBC의 ‘임국희의 여성살롱’은 최장수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기록돼 있다.
윤호미(48회)씨는 조선일보 부국장 출신으로, 34년 동안 기자생활을 해서 화제에 올랐던 인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1985년 해외 특파원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대한일보 편집국 기자출신인 이경순(51회)씨는 지난 6월까지 영상물등급위원회 제3기 위원장을 지냈다. 중앙일보 편집위원을 지낸 박금옥(51회)씨, 연합통신 논설위원 출신 윤혜원(53회)씨 등이 있다.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인 박명진(54회)씨는 초대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을 맡고 있고, 김현숙(53회)씨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예능PD를 맡아 관심을 받았다.
중앙일보 기자 출신의 홍은희(62회) 명지대 디지털미디어학과 교수, 조선일보 기자 출신의 신세미(63회) 문화일보 전문기자, 톡톡 튀는 프로그램 진행으로 유명한 KBS 아나운서 출신 이숙영(64회)씨와 KBS 아나운서 출신으로 서울시 홍보담당관을 지냈던 정미홍(65회)씨도 경기여고를 나왔다.
사회단체에서 활약中인 인사들
경기여고 출신 중에는 각종 사회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이대 영문과 명예교수인 윤정옥(33회)씨는 한국 정신대대책협의회 공동 회장을 맡고 있다. 35회 조명진씨는 평생 정신지체자 및 나환자들을 돌본 공로를 인정받아, 인권 옹호 10주년 기념 공로상을 수상했다. 정세화(39회)씨는 전 여성개발원장을, 오덕주(40회)씨는 서울국제부인회를 창설해 초대회장을 지냈고, 김천주(41회)씨는 주부클럽 회장을 맡고 있다. 42회 박동은씨는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냈다. 조규자(43회)씨는 남편 김대주 박사와 아프리카 니제르에서 30년 간 봉사활동을 해서, KBS가 주관한 4회 해외동포상을 받기도 했다. 김은영(48회)씨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매듭장, 장성자(50회) 前 양성평등교육원장, 김춘강(52회)씨는 대한어머니회중앙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박은경(52회)씨는 대한YWCA연합회 회장, 여성환경연대 공동대표를, 정광화(54회)씨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 나도선(55회)씨는 한국과학문화재단을 맡고 있다.
경기여고의 인맥은 해외로까지 이어진다.
32회 허병열씨는 뉴욕한국학교 교장을 지냈고, 36회 전혜성씨는 미 예일대에 동암연구소를 설립했다. ‘빛의 화가’로 불리는 방혜자(44회)씨는 프랑스 국비유학생 1호의 타이틀을 갖고 있으며, 이덕희(47회)씨는 하와이토카이 국제대학 이사장이다. 이씨는 ‘한인 미주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총부회장을 맡고 있다.
52회 송진주씨는 세계적인 물리학자다. 송인상씨의 딸인 그녀는 예일대에서 물리학 석·박사를 받은 뒤, MIT 공대 책임연구원, 남가주대 물리학과 교수를 거쳐 미국 물리학협회 이사를 맡았다. 현재 캘리포니아대 교수이자, 재미 한인물리학협회장, 미 국립과학재단 자문위원, 미 광학협회 자문위원, 미 국방부 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다. 60회인 김명희 선교사는 미국에서 활동 중이다. 1975년 미국으로 이민을 간 그녀는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데, 흑인 빈곤층 밀집지역인 할렘에서 선교활동을 벌여 동문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기도 했다.
‘최초’의 산실, 경기여고
오현주씨가 국내 최초로 미스유니버스대회에서 수상했다. |
3회 허영숙씨는 국내에서 최초로 병원을 개업한 여성개업의다. 그녀는 <무정>을 집필한 소설가 춘원 이광수씨의 부인이다. 같은 기수 졸업생인 이각경씨는 국내 최초의 여기자로 ‘매일신보’에서 활동했다.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로 ‘死(사)의 찬미’라는 앨범을 발표했던 윤심덕(4회)씨도 경기여고를 나왔다. 9회 졸업생 최은희씨는 최초의 민간신문 여기자였고, 12회 고봉경씨는 美군정시절 초대 경무부 여성경찰국장, 16회인 마현경씨는 국내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를 지냈다.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최은희 여기자상’은 그녀의 유언으로 제정된 상이다.
국내 최초의 여성과학자 김삼순(18회)씨, 국내 최초의 이공계 여성 박사학위 소지자 함복순(23회)씨가 이 학교를 졸업했다.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 편정희(26회)씨, 최초로 꽃꽂이 개인전을 연 임화공(30회)씨, 초전퀼트 박물관장 김순희(39회)씨, 최초의 여성 외교관 홍숙자(40회)씨, 국내 최초 여자치과의사회 초대회장 김찬숙(44회)씨, 국내 최초로 미스유니버스에서 수상한 오현주(46회)씨 등이 있다.
국내 최초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최초의 여성 외과의사 박귀원(54회)씨, 최초의 여성 금통위원인 이성남(54회)씨, 최초의 국내 공식 동시통역사 김지명(55회)씨 등이다. 외대 통역대학원 1기인 김지명씨는 APEC, ASEM 정상회담 에서 대통령 통역을 맡았고, 현재 한국통번역사협회 초대회장을 맡고 있다.
윤정로 교수는 “最初, 最高, 最大의 기록을 가진 경기여고 출신들을 찾으면서 앞선 세대에 대한 존경심이 들었다”고 했다.
윤 교수의 얘기다.
“모교 100년史를 준비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성찰의 기회가 됐습니다. 요즘은 박사학위를 따는 여성들이 많지만, 여성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시기에는 드문 일이었죠. 앞이 깜깜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자신의 삶을 개척한 모교 선배들을 접하니 존경심이 들더라고요. 선구자적인 선배들을 보면서 경기여고의 엘리트 교육의 의미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과거의 자료가 많지 않아 모교 출신 인사를 더 많이 찾지 못한 점이 아쉽네요”
1973년, 고교평준화 정책으로 ‘뺑뺑이 세대’ 등장
개교 초기부터 국내의 최고 여학교로 불려온 경기여고는 1973년을 기준으로 큰 변화를 맞게 됐다. 시험이 아닌 추첨으로 고등학교를 배정하는 고교평준화 정책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경기여고만의 문제는 아니었으나, 학교와 학생들에게 충격을 준 것은 사실로 보인다.
소위 ‘시험을 쳐서 들어간 세대’와 ‘뺑뺑이 세대’가 갈리게 된 것. 경기여고 65회는 ‘뺑뺑이 첫해’졸업생들이다. 시험을 통해 선발된 2~3학년 선배들과 함께 학교를 다녀야 했던 그들의 충격은 상당히 커 보인다. 홍콩 상하이은행에서 근무했던 손효남(65회)씨는 학교 문집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입학식은 환영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도대체 너희들이 이 학교를 어떻게 만들까’하는 염려스러운 분위기에서 시작됐다. 한창 사춘기였던 우리 기수들은 졸지에 천덕꾸러기가 됐다. 공부를 못하면 ‘뭐는 잘하겠어’라고 하고, 잘하면 잘하는 대로 ‘웬일로 그건 잘해’라는 소리를 들었다. 예민한 시기라 실제보다 더 예민하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적어도 평준화 첫해에 우리가 경기인이 되기엔 좀 어려운 분위기였다. 같은 야단을 맞을 때도 대부분 한마디가 더 붙곤 했다. 지금이라면 도저히 쓸 수 없는 단어가 선택되어 우리를 야단치는데 사용되었다.”
66회 기 대표였던 권혜경씨는 비슷한 기억을 떠올렸다.
“학교 다닐 때 선배들을 보면 제대로 고개를 들지 못했던 기억이 있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질감 같은 분위기가 팽배했었죠. 그랬기 때문에 더 악착같이 공부를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선배들이 이뤄놓은 전통에 먹칠하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감, 또 우리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들이 어우러져서 이를 악물고 공부했던 친구들이 많았어요.”
경기여고 내에서의 이 같은 이질적 문화는 과거 경기여중을 거쳐 경기여고에 입학하던 시절과, 다른 중학교에서 경기여고에 입학했던 때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산성(51회) 전 환경처 장관의 얘기다.
“저는 지방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여고에 입학했습니다. 경기여중을 졸업한 뒤 학교에 온 친구들이 저와 같은 非(비)경기여중 학생들을 ‘타교생’이라고 불렀어요. 경기여중ㆍ고를 진학한 학생들의 프라이드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선생들도 얘기를 시작할 때 ‘대 경기여고생이~’라고 말문을 열곤 했죠. 그렇다 보니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침묵 속에서 학교 생활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죽하면 말수가 적은 제가 신비로워 보였는지, 여학생들로부터 연애편지 같은 것이 올 정도였으니까요.”
“추첨 세대에게 역사와 전통 알려주기 위해 노력”(이숙영 前 교장)
이숙영 前 경기여고 교장 |
“추첨을 통해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에게도 늘 경기여고의 역사와 전통을 알려주기 위해 노력했어요. 개교기념식, 졸업식 때 경기여고 출신들이 참석해 축사를 할 때마다 얘기를 했죠. 가령 ‘지금 너희에게 얘기를 해주는 분이 너희의 선배인 누구다’, ‘현재 장관을 맡고 계신, 너희 선배 누구다’하는 식으로요. 학생들이 ‘와’하고 환호를 해요. 시험을 쳐서 들어온 세대는 아니지만, 자신의 선배들이 사회 곳곳에서 훌륭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것이 무척 자랑스러웠던 모양이에요.”
이 교장은 “과거의 경기여고 교복을 오늘날까지 입는 것도 전통의 계승”이라고 말했다.
“깃이 넓은 흰색 블라우스에 남색 A라인 스커트가 어찌 보면 요즘 말하는 예쁜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교사, 학부모, 학생들이 세련된 스타일 대신에 전통이 살아있는 이 옷을 선택했고,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진 학생들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1990년대 초반, ‘개포동 경기여고’시대에 학교를 다녔던 록밴드 ‘자우림’의 김윤아씨의 얘기다.
“저는 사실 경기여고를 다녔기 때문에 지금 음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고등학교 때 제 커리어를 결정할 만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많았거든요. 뮤지컬이 기억에 남아요. 경기 여고는 특별 교육이 강했어요. 1학년 때, 특별부 선배들이 교실을 찾아 다니면서 대학처럼 홍보하고, 자신이 소속돼 있는 특별활동부에 들어오라고 얘기하곤 했죠. 학교에서도 이런 활동을 자연스럽게 장려하셨던 것 같아요. 뮤지컬 몇 편을 만들어서 무대에 올리고, 2학년 때는 메인 스태프가 되어 출연도 하고, 노래도 하고 했어요.”
―여고 시절의 경험이 오늘날 가수 활동을 하는데 영향을 끼쳤나요.
“다른 학교는 음악부장이 없었는데, 경기여고는 있었어요. 저는 음악부장을 자원해서 하곤 했어요. 당시에 열정적인 음악 선생님들이 참 많았어요. 공부뿐 아니라, 교양을 갖춘 학생들을 만들기 위한 커리큘럼이 많았다고나 할까요. 음악실에 몰래 들어가서 피아노치고, 노래 만들었던 기억이 선명해요. 음악선생님들이 ‘윤아는 꼭 음대를 가라’고 힘을 불어넣어주시곤 했어요.”
―개포동으로 이전한 평준화 세대에 경기여고를 졸업했는데요.
“무슨 얘기 하시는지 알아요(웃음). 저희 학교 다닐 때 그런 이야기가 많았어요. ‘선배들이 후배들을 후배취급 안 한다’ 뭐 그런 얘기요. 근데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지리라고 믿고요.”
―1990년대 경기여고는 자유로웠나요.
“다정하면서도 엄격한 학교였어요. 엄격하지만 자상한 부모 밑에서 자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런 따뜻한 기억이 남아있는 학교예요.”
경기여고는 영부인을 배출했다. 전두환 前 대통령의 영부인 이순자(46회)씨다. 이 여사는 최근 발간된 동문 문집에서 ‘개교 100주년의 감회’에 대해 밝힌 바 있다. 그녀는 “자랑스러운 선배님들과 후배들이 함께 한 사람의 경기의 딸이라는 사실이 가슴 벅찼다.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이끌어 올리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한 수많은 인재들, 또 그들 곁에는 늘 그 남편에 못지않은 현명함과 능력으로 남편의 힘을 배가해 주는 부인들이 있었고, 그들 중 많은 분들이 바로 경기의 딸들이었다”고 얘기했다.
경기여고 44회
영부인 이순자 여사의 말처럼, 경기여고에는 남편의 힘을 배가해 주는 부인들이 많다.
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27회)씨, 삼양사 계열인 고 김상준 삼양염업 명예회장의 부인 구연성(28회)씨가 경기여고를 나왔다.
숙명여대 재단 이사이자, 고 김효규 전 아주대 총장의 부인 이귀명(30회)씨, 고 이영섭 전 대법원장의 부인 권태옥(31회)씨, 충북대와 한림대 총장을 역임한 정범모씨의 부인 주정일(31회)씨, 고 김중서 전 대법원 판사의 부인 장희순(38회)씨, 김상하 삼양그룹 회장 부인 박상례(39회)씨, 황조근정훈장을 수상한 김세권 전 서울고검장의 부인 박용언(40회)씨가 있다. 박용언씨는 두산그룹의 창업주 고 박두병 명예회장의 고명딸이기도 하다. 고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의 부인 박계희(42회)씨,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의 부인 이선영(43회)씨, 유창순 전 국무총리의 부인 이애자(43회)씨,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의 부인 이응숙(43회)씨도 경기여고 동문이다.
경기여고 44회 동기생들의 월례모임이 1997년, 서울 대학로의 한 음식점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장재식 前 국회의원의 부인 최우숙씨, 이수성 前 국무총리 부인 김경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부인 한인옥, 이종찬 前 국정원장 부인 윤장순, 권노갑 前 민주당 고문 부인 박현숙. |
경기여고 출신 정ㆍ재계 안주인들
전두환 前 대통령부인 이순자씨(46회)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부인 홍라희씨는 51회고, 허동수 GS칼텍스 회장의 부인 김자경씨와 고 박정구 전 금호그룹 회장의 부인 김형일씨는 52회 동창생이다. 이외에도 방상훈 조선일보사장의 부인 윤순명(53회)씨, 이용경 창조한국당 의원의 부인 김순희(53회)씨, 최연희 무소속 국회의원의 부인 김혜동(경희대 프랑스어학과 교수·54회)씨,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부인 이명희(56회)씨가 경기여고를 나왔다. 이명희씨는 경기여고 박물관인 경운박물관장을 맡고 있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부인 이경열(57회)씨,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부인 최선주(57회)씨,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부인 신연균(아름지기 이사장·58회)씨, 이주영 한나라당 의원의 부인 허영(58회)씨, 허창수 GS그룹 회장의 부인 이주영(59회)씨, 최규성 민주당의원의 부인 이경숙(60회)씨, 김학원 전 한나라당 의원의 부인 차명숙(60회)씨가 동문이다.
이종구 한나라당 의원의 부인 고혜경씨, 조욱래 동성개발 회장의 부인 김은주씨, 진영 한나라당 의원의 부인 정미영씨는 61회 동창생이다.
홍석규 보광그룹 회장의 부인 이계명(62회)씨, 유일호 한나라당 의원의 부인 함경호(62회)씨, 박진 한나라당 의원의 부인 조윤희(63회)씨,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의 부인 이화익(64회)씨가 경기여고를 졸업했다.
경기여고 출신 중에는 유명인사의 딸, 며느리들이 여럿이다.
김상협 전 국무총리의 세 딸과 며느리가 경기여고 출신이라는 점은 앞서 얘기한 바 있다. 이외에도 의친왕의 다섯 번째 딸인 이해경(36회)씨, 고 김인득 벽산그룹 회장의 두 딸 김인숙(46회)씨와 김연희(55회)씨가 경기여고를 나왔다. 고 이회림 전 동양제철화학 회장의 둘째딸 이숙희(47회)씨, 최규하 전 대통령의 딸 최종혜(60회)씨,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딸 박근령(61회)씨, 윤보선 전 대통령의 며느리 양은선(61회)씨, 김영삼 전 대통령의 둘째딸 김혜경(61회)씨가 이 학교 출신이다.
취재를 하다가, 이숙영 전 교장에게 “경기여고 출신들은 참 시집을 잘 간 사람도 많은 것 같다”고 했더니 이런 얘기가 돌아왔다.
“시집을 잘 갔다기보다, 경기여고를 나온 학생들의 부모님이 사위를 잘 골랐다는 표현이 적절할 수도 있어요. 경기여고를 보낼 정도로 교육열이 높고, 신식문화에 익숙한 부모들이어서, 사윗감을 신중히 골랐다고나 할까요(웃음). 시집 잘 가기 위해 공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다 보니 시집을 잘 간 후배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죠”
“여고시절 교육이 남편 내조와 육아에 큰 영향 끼쳐”(한인옥씨)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부인 한인옥씨(44회) |
―44회에는 유독 정치인들의 부인이 많습니다. 소속 정당도 다른데, 만나면 어떤 얘기를 하십니까.
“우연찮게도 우리 기수에 정치인 남편을 둔 친구들이 많아요. 누가 이렇게 하자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정치 얘기는 안 하는 것이 불문율처럼 되어버렸어요. 선거를 치를 때마다 서로 다른 당에 소속돼 있어도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정도예요. 하지만 자세히 말을 하지 않아도 비슷한 환경에 처한 친구들이 많다 보니 서로 의지가 되죠. 다른 모임에 가면 전·현직 대통령을 비난한다든가 하는 화제들이 있잖아요. 대선을 같이 치른 입장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면 난처한데, 여고 모임에서는 그런 것들이 없어요. 그냥 자식들 혼사 이야기, 상 치른 얘기, 최근에 읽은 책 얘기 같은 것들을 해요. 그런데 경기여고 졸업생들의 화제는 다른 모임과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어떻게 다른가요.
“건설적인 이야기들을 자주 한다고나 할까요. 박은혜 전 교장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을 잘 받아서 우리 스스로가 살찌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나라를 위해, 남들을 위해 모범이 돼야 한다고요. 아침마다 교가를 불렀는데, 그 내용도 나라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인지, 동창회에 나가면 사회적인 이슈들에 대한 얘기를 자주 하곤 해요.”
―1960년대 초·중반에 경기여고에 다닌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나요.
“우수한 학생의 상징이었어요. 하얀색 교복 칼라를 아침마다 빳빳하게 다려서 입고 다니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죠. 국가가 잘되기 위해서는 너희들이 똑똑하고 많이 배워야 한다는 얘기를 늘 들었어요.”
―경기여고 시절의 교육이 정치인의 부인으로서, 또 아이들을 키우는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십니까.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해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여학교에서는 아이들을 키울 때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가르쳤으면 좋겠어요. 한 가정의 분위기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많이 바뀌니까요. 아이들의 인성 형성에도 어머니의 역할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큰 그릇을 만들어 준다면, 어머니는 세심하게 아이들을 챙겨줄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여고시절에 배웠던 자긍심, 사회적 책임감 등이 아이들을 기르고, 내조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엘리트 그룹이다 보니,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지 않을까요.
“경기 출신들은 엘리트이기보다는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그룹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아요. 경기 출신들은 바람에 절대 휩쓸리지 않아요. 어떤 일에 대해 다같이 찬성한다거나, 모두 반대하는 일이 드물죠. 나름대로의 명분과 이유로 여러 사안들을 판단해요. 그렇기 때문에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오히려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봐요. ‘그 사람은 자신의 입장과 배경이 있으니까 저러지 않을까?’하는 식으로 합리적 사고를 하게 되죠. 어떨 때에는 혜택을 받은 극소수의 사람들은 나누고, 베풀고 살아야 한다고 느끼기도 하고요. 오히려 이해의 폭이 넓다고 생각해요.”
“여고에서 배운 대로 아이들 교육시켜”(송광자씨)
조석래 효성그룹회장 부인 송광자 |
“덕수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여중에 입학했을 때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몰라요. 열심히 공부해서 이곳만 졸업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경기여중ㆍ고는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최고의 학교였으니까요. 입학 후에 학교에 대해 믿음이 더 강해졌죠. 규율이 상당히 엄격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특별히 기억나는 활동이 있다면.
“스케이트, 수영, 농구 등 다양한 과목을 교과에 넣었기 때문에 사회에 나와서 생활할 때 혜택을 본 적이 많아요. 당시에 ‘수영장 25m 완주’가 체육 시험이었어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엄마는 어떻게 스케이트를 잘 타?’, ‘어떻게 수영 잘해?’하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여고 시절에 배웠으니까’라고 답했었어요. 엄마 노릇을 하는데 굉장히 플러스가 되는 활동이었다고 생각해요.”
―재계총수 집안의 안주인으로서, 엄마로서 지내는데 여고 시절 교육이 영향을 끼쳤습니까.
“여고에서 배운 대로 아이들이 규율에 충실한 생활을 하도록 가르쳤어요. 어떤 일이든 충실하게 몰입해서 해야 한다고요. 우리 집 세 아이들은 서열이 뚜렷해요. 호칭도 ‘큰형님’, ‘작은형님’이라고 깍듯하게 하고요. 여고 시절 습관이 자식 교육시키는데 영향을 끼친 거죠.”
―100년을 이어온 경기여고의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명예와 사람, 전통을 지킬 수 있는 것 등이죠.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최고의 공교육 場(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모교지만, 존경심이 드는 학교죠.”
1998년 정동에서 개포동으로 이전
경기여고는 1980년대 말, 또 다른 변혁을 경험하게 된다. 강북 정동 1번지 돌담길 끝자락에 위치한 교정을 버리고, 강남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경기여고는 1998년, 오늘날 경기여고가 자리하고 있는 서울 강남구의 개포동으로 이사했다. 이행자 전 YWCA회장은 당시 사정을 소상히 알고 있다. 이 전 회장은 당시 강남구 국회의원이었던 이태섭 전 의원의 부인이다. 그녀는 “경기여고가 이전하는데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했다.
“당시 남자 경기고등학교, 서울고등학교 등이 강남으로 학교를 이전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이전과 경기여고는 달랐어요. 남자학교는 자기들이 옮긴 것이고, 우리는 학교가 미국 대사관저 옆에 있어서, 옮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강서구, 송파구에서 경기여고를 유치하려는 노력이 많았습니다.”
─강남으로 낙점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경기여고 출신들은 사실 시험을 통해 선발됐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평준화의 시대를 맞이했지만, 학교는 학부형에 따라, 학교가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청담동, 잠원동 등을 모두 둘러봤지만, 다른 지역보다 그 곳의 여건이 좋아 보여서 결정했습니다. 에피소드도 많아요”
─어떤 것입니까.
“일단 부지는 개포동으로 대략 정해졌습니다. 당시 영부인이었던 이순자씨도 여러모로 관심을 써줬어요. 특별히 나서지는 않았지만, 모교에 대한 사랑이 크다보니 관심이 컸죠. 위치는 정했는데, 학교부지가 문제였습니다. 여의도 고등학교가 5000평인데, 경기여고의 부지가 턱없이 작았습니다. 이경숙 숙대 총장, 당시 이종찬 의원의 부인 윤장순씨, 제가 여러 번 시청에 찾아가고 사정했습니다. ‘우리가 옮기고 싶어서 옮기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든 학교 부지를 마련해줘야하는 것 아니냐’고요. 시청 문에서 나오면서 처지가 어려워 울기도 여러 번 했습니다. 결국 현재의 경기여고 부지 옆에 남산운수 회사 땅까지 받아서 옮기게 됐습니다”
또 다른 100년을 기약
문영혜 경운회장 |
100 년의 역사 속에 수많은 사회 저명인사를 배출한 경기여고이지만, 일부에서는 ‘경기여고 출신들을 대하기 어렵다’고 말을 한다. ‘깐깐하다’, ‘쌀쌀맞다’는 평가한다. 졸업생들도 이 부분에 대해서 일부 공감을 하면서도, 오해가 있다고 털어놓는다. 이경숙 숙대 총장의 얘기다.
“매주 월요일 조회 때마다 ‘경기여고는 우리나라 수재의 전당’이라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엘리트 의식, 일류의식을 갖게 됐습니다. 학생들의 자부심과 긍지가 당당해 보여 그렇게 평가하는 분도 있지만, 졸업생 한 사람 한 사람은 따뜻한 품성과 섬세한 감성을 여고 시절에 키울 수 있었다는데 동의하리라 봐요.”
이영애 자유선진당 국회의원의 얘기다.
“학교 교육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각자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지는 것이었어요. 자기 책임을 완수하는데 완벽을 기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어, 필요 이상으로 남의 일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한 간섭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생활 태도가 쌀쌀맞고 깐깐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기도 하지만, 그 기본에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가 깔려 있어요.”
경기여고 100주년 기념사업회회장인 김찬숙씨는 ‘100주년 기념관’을 건립하고 있다.
김 회장은 “지난 세월 동안 경기여고가 명문이라고 회자됐던 것처럼, 이제 ‘100주년 기념관’이 인재기념관으로 대한민국 명소로 일컬어질 수 있도록 꼼꼼하게 만들겠다”고 말했다.
개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문영혜(47회) 경운회장의 감회는 남다르다. 문 회장의 얘기다.
“경기여고의 100주년은 입학시험을 통해 선발된 세대와 추첨으로 학교에 배정된 세대가 함께 이뤄낸 일입니다. 시험세대는 진짜 경기여고생이고, 그렇지 않은 세대는 인정할 수 없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있을 수 없죠. 시대의 변화에 맞게 경기여고가 변신을 했고, 평준화 시대 이후에도 훌륭한 후배들이 사회 각층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비추첨과 추첨 세대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경기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한 마음으로 지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와 함께해 온 경기여고의 100주년을 지켜보는 심정은 한마디로 감개무량하다는 것이에요. 앞으로 또 다른 100년을 보내며 대한민국의 대표 여성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하기를 기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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