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9일 화요일
2020년 9월 29일 화요일
2020년 9월 28일 월요일
일생에 한번 보기 힘든 신비로운 대나무 꽃 ‘활짝’
경남 진주-창원 국도변에서 왕대 1000여본 개화
국내에는 5속 18종의 대나무 종이 분포하며 면적은 약 2만2000ha에 달하지만 대나무의 꽃을 보는 것은 매우 어려워 ‘신비의 꽃’이라고 불린다.
대나무 꽃은 특성과 발생이 신비롭고 희귀해 예로부터 대나무에 꽃이 피면 국가에 좋은 일이 발생할 징조라고 해 희망을 상징한다.
대나무는 꽃이 피기 시작하면 기존에 자라고 있던 대나무 줄기와 지하로 뻗은 뿌리가 완전히 죽게 된다. 이후 뿌리에서 숨은 눈이 자라면서 다시 재생되지만, 꽃이 피기 전과 같은 상태로 대나무 숲이 회복되는데 10여 년 이상이 걸린다.
대나무 개화의 원인은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관련 학설로 60∼120년 만에 핀다는 주기설, 특정한 영양분이 소진돼 발생한다는 영양설 등이 있다.
산림바이오소재연구소 손영모 소장은 “씨앗이 아닌 땅속 뿌리로 번식하는 대나무가 꽃이 핀 것은 매우 희귀한 현상이다”며 “향후 대나무 꽃이 피는 숲을 대상으로 입지환경, 영양상태, 유전자 분석 등을 통해 개화 원인을 밝혀냄과 동시에 건전한 대나무숲 관리를 위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진주=뉴시스]
산림바이오소재연구소 손영모 소장은 “씨앗이 아닌 땅속 뿌리로 번식하는 대나무가 꽃이 핀 것은 매우 희귀한 현상이다”며 “향후 대나무 꽃이 피는 숲을 대상으로 입지환경, 영양상태, 유전자 분석 등을 통해 개화 원인을 밝혀냄과 동시에 건전한 대나무숲 관리를 위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진주=뉴시스]
2020년 6월 12일 금요일
길 路
남송(南宋)의 유명 시인 육유(陸游)가 길을 묘사한 시구는 퍽 유명하다. 산과 물이 계속 겹쳐지는 경우를 그렸다. "산중수복의무로(山重水複疑無路)"다. 산과 물[山水]이 줄곧 이어져[重複] 더 이상 길이 없어 보인다는 뜻이다. 앞부분은 달리 '산궁수진(山窮水盡)'으로 적기도 한다. 산길이나 물길이 다 막힌 상황이다. 모두 더 이상 나아가기 힘든 상태, 궁지에 몰린 경우다. 다니기 힘든 길인 험로(險路)에 갇힌 사람의 형편이다.
길에 관한 중국인의 심사는 복잡하다. 우선 다니기 쉬운 길에 집착한다. 평평(平平), 평로(平路), 평탄(平坦), 평전(平展), 탄탄(坦坦), 대도(大道), 대로(大路) 같은 단어가 그 맥락이다. 좋은 길에 관한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다. 어려운 길을 피하려는 심리도 강하다. 주로 산길이 그 대상이다. 바위 등이 많아 다니기 힘든 길은 기구(崎嶇)다. 험준(險峻)도 마찬가지다. 험산준령(險山峻嶺)도 발길을 막는다. 낭떠러지인 현애(懸崖)에서는 한숨부터 나온다. 절벽(絶壁) 앞에 서도 그렇다. 옴짝달싹하기도 힘든 좁고 위험한 길은 애로(隘路)다. 군사(軍事)에서는 가장 피하는 길이다. 깊은 골짜기에 들어서면 나아가지도, 물러서지도 못한다. 진퇴유곡(進退維谷), 진퇴양난(進退兩難)이 그 성어다.
중국이 안팎으로 시련이다. 코로나19의 발생과 확산이라는 과정을 두고 벌어질지 모를 책임 문제
등 악재의 연속이다. 몸은 첩첩산중(疊疊山中)인데 어느덧 서산에 해가 지는 형국인지 모른다. 산과 물에 발길이 막힌 시인 육유의 눈에 문득 들어온 정경이 있다. "버드나무 그늘 아래 핀 꽃, 그리고 마을 하나(柳暗花明又一村)." 궁색한 지경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출로(出路)를 의미한다. 어려운 상황에 빠진 중국이 어떻게 새 길을 찾을지 주목거리다.
중국이 안팎으로 시련이다. 코로나19의 발생과 확산이라는 과정을 두고 벌어질지 모를 책임 문제
등 악재의 연속이다. 몸은 첩첩산중(疊疊山中)인데 어느덧 서산에 해가 지는 형국인지 모른다. 산과 물에 발길이 막힌 시인 육유의 눈에 문득 들어온 정경이 있다. "버드나무 그늘 아래 핀 꽃, 그리고 마을 하나(柳暗花明又一村)." 궁색한 지경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출로(出路)를 의미한다. 어려운 상황에 빠진 중국이 어떻게 새 길을 찾을지 주목거리다.
조선일보
2020년 5월 29일 금요일
José Feliciano, Que Será, Festival de Viña 2006
Uno de los más grandes artistas latinos, el maestro JOSE FELICIANO vuelve al Show del Festival Internacional de la Canción de Viña del Mar 2006...Encuentra más vídeos de JOSE FELICIANO en nuestro Canal Histórico...Recuerda, somos el Canal Histórico del Festival Internacional de la Canción de Viña del Mar...Suscríbete y síguenos 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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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festivaldevinachile.com
"Las cintas originales del Festival Internacional de la Canción de Viña del Mar se encuentran resguardados en el Archivo Histórico Patrimonial de la I. Municipalidad de Viña del Mar, Chile".
Che Sera / Jose Feliciano
Paese mio che stai sulla collina
언덕위에 있는 나의 마을...
Disteso come un vecchio addormentato,
잠들어 있는 노인처럼
La noia, l'abbandono il niente son la tua malattia,
허무함와 지루함으로 병들어 있구나
Paese mio ti lascio io vado via.
나 이제 여기를 떠나련다
Che sara' che sara' che sara'
무엇이든 되겠지
Che sara' della mia vita chi lo sa!
내 인생이 어찌 될지 그 누가 알겠어?
So far tutto o forse niente da domani si vedra'
어찌 될런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될꺼야
E sara', sara' quel che sara'.
무엇이든 되긴 될테니까
Gli amici miei son quasi tutti via
많은 내 친구 들이 떠나갔어
E gli altri partiranno dopo me
나머지 친구들도 나를 따를테고
Peccato perche' stavo bene in loro compagnia
안타깝게도, 함께 즐겼던 친구들 이제는 모두가...
Ma tutto passa tutto se ne va.
인생사란게 지나쳐 가고, 계속 되어지는 그런 것이야.
Che sara' che sara' che sara',
무엇이든 되겠지
Che sara' della mia vita chi lo sa!
내 인생이 어찌 될지 그 누가 알겠어?
Con me porto la chitarra e se la notte piangero'
나의 기타는 나와 함께 할테고 밤이 되면 울릴거야
Una nenia di paese suonero'.
고향의 자장가가 되어서 말이야
Amore mio ti bacio sulla bocca,
내 사랑, 당신께 입을 맞춰요
Che fu la fonte del mio primo amore
첫 사랑 당신께
Ti do l'appuntamento come e quando non lo so,
우리는 언제 어디서 만날런지 알 수는 없지만
Ma so soltanto che ritornero'.
내가 돌아오리란 건 확신해요
Che sara' che sara' che sara',
무엇이든 되겠지
Che sara' della mia vita chi lo sa!
내 인생이 어찌 될지 그 누가 알겠어?
Con me porto la chitarra e se la notte piangero'
나의 기타는 나와 함께 할테고 밤이 되면 울릴거야
Una nenia di paese suonero'.
고향의 자장가가 되어서 말이야
Che sara' che sara' che sara',
무엇이든 되겠지
Che sara' della mia vita chi lo sa!
내 인생이 어찌 될지 그 누가 알겠어?
So far tutto o forse niente da domani si vedra'
어찌 될런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될꺼야
E sara', sara' quel che sara'.
무엇이든 되긴 될테니까
Che sara' che sara' che sara',
무엇이든 되겠지
Che sara' della mia vita chi lo sa!
내 인생이 어찌 될지 그 누가 알겠어?
So far tutto o forse niente da domani si vedra'
어찌 될런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될꺼야
E sara', sara' quel che sara'.
무엇이든 되긴 될테니까
2020년 4월 18일 토요일
대구-조선 5대 서원 도동서원 道東書院 가을보다 맑은 선비의 마음, 낙동강이 절하다
“대구로 놀러 가자고?” 대구시민들이 들으면 버럭 화를 낼지 모르지만 그동안 대구는 “볼 것도, 먹을 것도, 즐길 것도 없는 내륙도시” 이미지가 강했다. 팔공산과 동화사가 있긴 하지만 꼭 들르고 싶고, 꼭 들러야 하는 전국적인 명소가 드문 게 사실이다. 물론 여행자의 시선으로 본 품평이다. 하지만 직접 대구에 가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눈앞에 둔 도동서원(道東書院)은 건축미가 놀랍다. 김광석 거리의 가을 정취는 단풍산보다 짙고 깊다. 근현대가 절묘하게 녹아 있는 골목길을 거닐다 왁자한 재래시장에서 얼얼한 국밥 한 그릇 비우고 나면 대구가 물을 것이다. “이제 됐나?”
■ 서원에서 인성을 배우다
“서원은 조선시대 최고 실력을 갖춘 스승을 모시던 학교입니다. 도동서원은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조선 5대 서원 중 한 곳이었으니 서울의 최고 명문대학이라고 보면 됩니다.”
문화해설사 송은석씨(55)는 “서원은 사대부 집안의 이름 있는 자손들이 공부하던 곳”이라며 “도동서원은 소박하면서도 간결한 조선 서원 건축의 백미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대구 달성구 구지면 도동리 35번지. 멀리서 보니 도동서원은 낙동강이 품에 안고 있는 아담한 학교였다. 서원에 도착하자 커다란 은행나무가 길을 막아선다. 키 25m에 둘레가 8.7m나 되는 은행나무는 수령이 400년이라고 했지만 생김새가 1000년은 넘어 보인다. 서원 정문인 수월루를 지나니 ‘환주문(喚主門)’이 보였다.
학교마다 건학이념이 있듯 유교의 건축물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도동서원에서 가장 매력적인 건물인 ‘환주문’은 ‘주인을 부르는 문’으로 하늘에서 부여받은 천성을 잠시도 놓치지 말고, 내 안의 주인을 불러 깨우라는 뜻이 담겨 있다. 나를 스스로 깨우쳐 수양하면 최고 경지인 성인은 못돼도 그 아래 군자와 현인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환주문으로 오르는 10여개의 계단은 폭이 좁고 엉성했다. 문 높이가 겨우 1m69에 불과했다. 도포 자락을 잡고 갓을 쓴 조선 양반들이 문을 넘기가 쉽지 않았겠다. 아무리 똑똑한 선비라 해도 큰 스승을 모셨으니 경건하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라는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조선시대 유생들은 서당 공부를 마치고 중등교육을 받았다. 서원과 향교가 그 역할을 했다. 서원은 조선 성리학의 정수가 서린 곳으로 인재를 키우고 선현에 제사를 지내던 사설기관이다. 지방 공립인 향교가 도심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기관이었다면, 사립인 서원은 산속에 자리 잡고 학문을 익히고 토론하는 데 열중했다. 도동서원은 조선시대 5현인 이황, 조광조, 정여창, 이언적의 수장으로 불리는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개혁주의자 조광조의 스승으로 유명한 김굉필은 실천을 중시한 ‘소학동자’였다. <논어> <맹자> <대학> 대신 초등학교 윤리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소학>을 파고들었다. 인성이 최고의 덕목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리라.
계단을 조심조심 올랐다. 옛 선비들은 걸음을 걸을 때도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유교에서 왼쪽 발은 양, 오른쪽 발은 음의 세계다. 계단을 오를 때는 도포 자락을 잘 잡고 왼발을 먼저 올린 다음 모둠발을 한 뒤 다시 왼발을 올려야 한다. 쉬운 게 없었지만 더딘 걸음에서 옛 선비들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었다.
토담은 새색시처럼 정갈했다. 고개를 숙이고 문으로 들어서다 불룩 튀어나온 돌에 넘어질 뻔했다. 배움터에 들어설 땐 삿갓 쓴 머리도, 도포 아래 발도 조심하라는 경계석이었다. 마당에 도착하니 스승이 다니는 중간 길에 거북이 한 마리가 두 눈을 부릅뜨고 앉아 있었다. 선비들 식은땀깨나 흘렸겠다.
■ 서원에서 건축을 배우다
도동서원은 다른 서원과 달리 중정당 나무 기둥에 새하얀 창호지가 둘러져 있다. 햇빛과 달빛을 받은 창호지는 밤낮없이 도동서원을 반짝반짝 빛나게 하고, 낙동강을 지나는 배들은 도동서원임을 알고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단청 없는 강당의 퇴계 이황 편액이 눈길을 잡아끈다. 1568년 비슬산 기슭에 세워졌다가 불에 타 1601년 지금의 자리로 도동서원을 옮길 당시 퇴계는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제자들이 퇴계 살아생전 글자를 뽑아 편액을 썼다. 퇴계는 전국에 서원이 생길 때마다 시를 짓고 편액을 썼다. 후세들은 “퇴계가 살아 계셨다면 분명히 직접 현판을 내렸을 것”이라고 전했다.
도동서원의 강당인 중정당에 오를 땐 기단 조각품을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지붕의 기와 한 장, 기단에 쓰인 돌덩어리의 색깔과 모양이 모두 다르다. 4각, 5각, 6각은 물론이고 12각형 돌까지 빈틈없이 쌓여 있다. 조각보를 만들어도 이보다 정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맞춰진 기단석에는 용머리 4개가 붙어 있었다. 3개는 진짜가 아니라고 하는데 개보수한 용머리는 누가 봐도 가짜였다. 기단석 한쪽은 다람쥐가 연꽃을 안고 올라가고, 다른 쪽은 내려오고 있었다. 오른쪽 계단은 올라갈 때, 왼쪽은 내려갈 때 이용하라는 뜻이다.
신발을 벗고 중정당에 올라섰다. 대쪽 같은 선비들이 의관을 정제하고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강당 양쪽에 있는 스승의 방문이 특이했다. 창호지가 창살 바깥에 붙어 있었다. 방 안 중요한 공간 쪽을 창호지로 막는 게 일반적인데 거꾸로 발라놓았다. 책 읽는 강당을 스승의 방보다 더 중요한 공간으로 보았던 것이다.
지금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보였다. 좁은 방에서 10여명이 기거했는데 동재는 양반 자제와 상급생들이, 서재는 평민과 하급생들이 머물던 곳이다. 언뜻 보기엔 비슷해 보였는데 내려가보니 영 딴판이었다. 동재에는 공부를 하다 피곤하면 쉴 수 있는 툇마루가 있었고 멋들어진 원기둥에 마루와 벽은 나무로 돼 있어 시원했다. 건너편 서재는 흙벽으로 돼 있어 답답하고 툇마루 대신 아궁이가 드러나 있었다.
도동서원을 뒤로하고 소나무 숲길을 따라 구불구불 다람재에 올랐다. 멀리 정연하게 앉아 있는 도동서원이 보인다. “禮義之始(예의지시), 在於正容體(재어정용체), 齊顔色(제안색), 順辭令(순사령)(예의의 시작은 몸을 바르게 하고 얼굴빛을 단정하게 하며 말을 온순하게 하는 데 있다).”(<예기>) 400~500년 전 이 먼 길을 걸어서 학문과 예를 익혔을 선비와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경향신문
2020년 1월 7일 화요일
"As Tears Go By" 난 그저 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고 있었네
It is the evening of the day
I sit and watch the children play
Smiling faces I can see, but not for me
I sit and watch as tears go by
My riches can't buy everything
I want to hear the children sing
All I hear is the sound of rain falling on the ground
I sit and watch as tears go by
It is the evening of the day
I sit and watch the children play
Doing things I used to do, they think are new
I sit and watch as tears go by
It is the evening of the day
I sit and watch the children play
smiling faces I can see but not for me
I sit and watch as tears go by
어느날 저녁
난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네
아이들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어
난 그저 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고 있었네
my riches can't buy everything
I want to hear the children sing
all I hear is the sound
of rain falling on the ground
I sit and watch as tears go by
내가 부자라고 모든 것을 살 수는 없네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만 내가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오직
땅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뿐
난 그저 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바라보고 있었네
It is the evening of the day
I sit and watch the children play
doing things I used to do they think are new
I sit and watch as tears go by
Few stars of the '60s have reinvented themselves as successfully as Marianne Faithfull. Coaxed into a singing career by Rolling Stones manager Andrew Loog Oldham in 1964, she had a big hit in both Britain and the U.S. with her debut single, the Jagger/Richards composition "As Tears Go By" (which prefaced the Stones' own version by a full year). Considerably more successful in her native land than the States, she had a series of hits in the mid-'60s that set her high, fragile voice against delicate orchestral pop arrangements: "Summer Night," "This Little Bird," and Jackie De Shannon's "Come and Stay with Me." Not a songwriter at the outset of her career, she owes more of her fame as a '60s icon to her extraordinary beauty and her long-running romance with Mick Jagger, although she offered a taste of things to come with her compelling 1969 single "Sister Morphine," which she co-wrote (and which the Stones released themselves on Sticky Fingers later).
In the '70s, Faithfull split up with Jagger, developed a serious drug habit, and recorded rarely, with generally dismal results. This occurred until late 1979, when she pulled off an astonishing comeback with Broken English. Displaying a croaking, cutting voice that had lowered a good octave since the mid-'60s, Faithfull had also begun to write much of her own material, and addressed sex and despair with wrenching realism. After allowing herself to be framed as a demure chanteuse by songwriters and arrangers throughout most of her career, Faithfull had found her own voice, and suddenly sounded more relevant and contemporary than most of the stars she had rubbed shoulders with in the '60s. Faithfull's recordings in the '80s and '90s were sporadic and erratic, but generally quite interesting; Strange Weather, a Hal Willner-produced 1987 collection of standards and contemporary compositions that spanned several decades for its sources, was her greatest triumph of the decade. In 1994, she published her self-titled autobiography; the biography -As Tears Go By by Mark Hodkinson is an objective and thorough account of her life and times.
Faithfull returned to recording in 2002 with Kissin' Time, an eclectic collection of songwriting collaborations with Beck, Damon Albarn, Billy Corgan, Jon Brion, and Jarvis Cocker among others. In 2004, Before the Poison was released in the U.K., making its entrance into the U.S. market in early 2005. This album continued in the vein of its predecessor, with songwriting and production contributions from PJ Harvey, Nick Cave & the Bad Seeds, Brion, and Albarn, but with far more consistent results. Faithfull and Willner released Easy Come Easy Go in 2008, an all new collection of typically eclectic covers from the likes of Morrissey, the Decemberists, Billie Holiday, Black Rebel Motorcycle, and Dolly Pa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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