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25일 토요일

將進酒

君不見 黃河之水天上來
군불견 황하지수천상래

君不見 高堂明鏡悲白髮
군불견 고당명경비백발

人生得意須盡歡
인생득의수진환

天生我材必有用
천생아재필유용

烹羊宰牛且爲樂
팽양재우차위락

岑夫子 丹丘生
잠부자 단구생

與君歌一曲
여군가일곡

鐘鼓饌玉不足貴
종고찬옥부족귀

古來聖賢皆寂寞
고래성현개적막

陳王昔時宴平樂
진왕석시연평락

主人何爲言少錢
주인하위언소전

五花馬
오화마

呼兒將出換美酒
호아장출환미주










李白

奔流到海不復回
분류도해불부회

朝如靑絲暮成雪
조여청사모성설

莫使金樽空對月
막사금준공대월

千金散盡還復來
천금산진환부래

會須一飮三百杯
회수일음삼백배

進酒君莫停
진주군막정

請君爲我傾耳聽
청군위아경이청

但願長醉不用醒
단원장취불용성

惟有飮者留其名
유유음자류기명

斗酒十千恣歡謔
두주십천자환학

徑須沽取對君酌
경수고취대군작

千金
천금구

與爾同銷萬古愁
여이동소만고수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
황하의 강물이 하늘에서 내려와 콸콸 흘러 바다에 이르러 다시 돌아가지 못함을
그대는 보지 않았는가?  
멋진 저택에서 거울에 비친 백발을 슬퍼함을 아침에 푸른 실 같은 머리카락이 흰 눈처럼 되었다네   
인생에 뜻을 얻었으면 모름지기 즐기기를 다할지니
금 술동이를 부질없이 달빛 아래 두지 말라
하늘이 나를 낼 적엔 재능이 반드시 쓸 곳이 있을지니
천금의 돈도 다 쓰고 나면 다시 돌아오게 마련이다
양을 삶고 소를 잡아 또한 즐겨보세
모로매 한 번 마심에 삼백 잔은 마시세  
잠선생, 단구 선생
술을 들어 그대는 멈추지 말게
그대들을 위해서 노래 한 곡 할테니
청컨대 그대들은 나를 위해 귀를 기울여 달라
좋은 음악도 좋은 음식도 족히 귀할 것이 못되니
다만 원하는 것은 길이 취해 깨지 않는 것이라네  
예로부터 성인이나 현인은 모두 쓸쓸하였으나  
오직 술마시는 자만이 그 이름을 남겼다네  
진왕은 옛날 평락관에서 잔치할 적에  
한 말에 만 냥하는 술도 실컷 마시며 즐겼다네
주인은 어찌해서 돈이 없다 하는가?  
즉시 술을 사다가 그대들에게 권하겠네
오색빛 나는 말과 천금이나 되는 갖옷도  
아이를 불러 나가서 술과 바꾸어 오게 해서
그대와 더불어 함께 영원한 이 근심을 녹여보리라

                                                                                                                                  

'변형 자산' 있어야 100세 시대 성공한다

다가온 100세 시대… 무형자산 늘려라

린다 그래튼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
▲ 린다 그래튼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
런던비즈니스스쿨의 MBA 수업 도중 한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했다. "당신이 100년을 산다고 가정할 때, 소득의 약 10%를 저금하고, 최종 연봉의 50%를 가지고 은퇴할 수 있는 시점은 언제인가?" 학생들은 곧바로 계산을 했고, 답은 80대였다. 교실은 조용해졌다. 장수의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모두 80대까지 지금과 같은 업무 강도로 일해야 한다. 평균 근로 기간이 30년에서 50년으로 늘어나는 셈이다.

이 수업의 주인공은 린다 그래튼(Gratton·62)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다. 장수의 축복이 어느새 저주가 돼버린 이 시점에 그래튼 교수는 "지금까지 '학교-직장-은퇴' 3단계로 나뉜 인생의 프레임부터 바꿔야 한다"며 "100세 인생을 행복하게 누리기 위해서는 앞으로 '늘어나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경영학계 오스카상이라는 '싱커스 50(Thinkers 50)'에 2011~2015년 연속 선정됐다.

그래튼 교수는 지난해 6월 같은 학교 교수 앤드루 스콧과 함께 출간한 신간 '100세 인생(The 100-Year Life)'을 통해 연장된 수명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한 방법을 소개했다. 책에서 그는 '유형 자산', 즉 돈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긴 인생의 여정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가족, 친구, 연인, 건강, 유연함 등 다양한 무형 자산도 보유해야 한다. 특히 유연함이 중요하다. 결국 우리는 살면서 여러 직업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여러 국가에서 살아볼 확률도 높다. 새로운 경험에 열려 있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성향은 100년의 인생을 건강하게 살아가는 큰 자산이 될 것이다."

[Weekly BIZ] '변형 자산' 있어야 100세 시대 성공한다
▲ 100세 시대에는 좋은 삶을 누리기 위해 돈(유형 자산)뿐 아니라 기술과 지식, 건강과 우정, 변화에 대한 적응력 등 무형 자산도 똑같이 중요해진다. 단거리 경주가 아닌 마라톤의 삶을 잘 살기 위해선 새로운 삶의 단계와 순서를 재설계해야 한다.
지난달 그래튼 교수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18세든, 45세든, 60세든, 당신은 지난 세대와 다른 방식으로 미래를 헤쳐나가야 한다"며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한 뒤, 나이 들면 은퇴하는 틀은 이제 더이상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은퇴·정년 개념 사라져

―100세 시대를 연구하게 된 이유가 있나.

"지난해 서구권 국가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절반은 평균 예상 수명이 105세다. 100세 시대는 우리의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의 대다수는 최소 90대까지 살 것이다.

1970년 이후 한국인의 기대수명
장수는 이미 우리에게 당연한 일이 됐지만, 어떻게 해야 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놀라울 정도로 부족하다. 과거에 '당연했던 것들'은 이제 '상상 속 혹은 역사 속의 일'이 될 것이다."

―어떤 '당연한 것'들이 사라지나.

"은퇴 혹은 정년이라는 개념이 사라질 것이다. 앞으로 사람들은 더 오래 일해야 한다. 당연한 소리 같겠지만, 대학 졸업 후 20~30년간 열심히 일하고 은퇴 후 연금으로 소소하게 노년을 즐기는 모습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70~80대도 30~40대처럼 일하게 된다는 얘기인가.

"기업은 앞으로 60세에 직원을 내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을 실직으로 내몰면 그만큼 경제적 파장이 크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70~80대가 직장을 가질 수 있단 얘기도 아니다. 급변하는 고용시장에서 그들이 생산성을 유지하려면 새로운 스킬에 대한 근본적인 투자가 중요하다. 만약 당신이 은퇴를 앞둔 40대라면, 야근과 주말 근무로 회사에 온 힘을 쏟는 대신 여가 시간에 능력을 재창조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어떤 능력을 키워야 하나.

"무형 자산을 키워야 한다. 예컨대, 배움은 풍부한 삶을 살기 위한 필수 요소다. 이를 '생산적 자산'이라고도 하는데, 궁극적으로 유형 자산, 즉 돈을 벌게 해주는 초석이 된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지식은 수입 잠재력을 높인다. 과거에는 대학을 졸업하는 것으로 학습이 끝나는 경우가 대다수였지만, 100년 인생은 '100년의 공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전문성을 습득하는 것은 평생의 작업이 될 것이다."

새 기술 배우고 개인 네트워크 가져야

―인적 네트워크도 중요하다고 했다.

"가족, 친구 등 인간관계 역시 '생산적 자산'에 속한다. 좋은 평판에 대한 중요성은 새로운 분야에 진입할 때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이를 개인 브랜드 구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봐도 그렇고, 최근 연구 결과가 뚜렷이 보여주는 사실이 하나 있다. 60대가 넘어서면 어려움을 겪을 때 어깨를 빌려 줄 새 친구를 사귀기 어렵다. 100년의 세월 동안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다면, 친구를 사귀고, 인맥을 넓히는 일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건강도 중요하지 않나.

"그렇다. 건강은 무형 자산 중 '활력 자산'이라고 부른다. 건강한 식습관, 규칙적인 운동, 스트레스 관리는 긴 삶을 행복하게 사는 데 결정적이다. 물론 더 오래, 젊은이들만큼 일할 수 있게 하는 중요 자산이기도 하다."

―70~80대에게 필요한 능력이 또 있나.

"평생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 즉 '변형 자산'이 필요하다. 삶에 대한 유연한 자세는 무엇보다 중요해질 것이다. 100년을 사는 동안 우리는 최소 2~3개 이상의 직업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다양한 도시, 혹은 다양한 국가에서 살게 될 경우도 많아질 것이다."

―70~80대가 젊은 층보다 업무 면에서 더 유리한 능력도 있지 않나.

"70~80대를 하나의 특성으로 분류하려는 관점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이 또한 바꿔야 한다. 보통 어릴수록 한 가지 특성으로 그 세대를 분류하기 쉽지만, 윗세대는 다르다. 살아온 환경, 경험에 따라 70~80대는 젊은 층보다 훨씬 더 다양한 성향을 지니고 있다. 어떤 이들은 아이디어를 내는 데 강점이 있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글을 잘 쓰거나, 회계 업무를 잘 볼 수도 있다. 세월의 경험으로 누적된 능력은 개인의 특성을 강화시킨다. 이 때문에 그들을 하나의 세대로 카테고리화해서 모두 비슷한 능력을 보유할 거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조선일보

백거이 시선 "백성의 고통 사실적으로 묘사"

당나라의 위대한 시인 백거이의 대표작을 모았다. 그동안 국내에는 한적시 위주로만 소개되었으나 이 시집에는 그의 풍유(諷諭)·한적(閑適)·감상(感傷)·잡률(雜律)시를 시기별로 고루 실었다. 그의 시는 동네 할머니나 어린아이조차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다. 그렇기에 더욱 누구에게나 감동을 준다. 
백거이는 일생 동안 3000여 편에 달하는 시를 남겨 놓아 당나라 시인 중에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시인이며,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이후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 할 수 있다. 
백거이는 강주(江州)에 있을 때에 자신의 시가 작품을 정리 편집하면서 풍유(諷諭)·한적(閑適)·감상(感傷)·잡률(雜律) 네 부문으로 분류한 적이 있다. 이 중 백거이 자신은 풍유시와 한적시를 비교적 중시했다. 풍유시는 “세상 구제”를 반영하고, 한적시는 “자기 수양”을 드러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거이는 <여원구서(與元九書)>에서 “문장은 시대에 부합하게 쓰고, 시가는 현실에 부합하게 지어야 한다(文章合爲時而著, 詩歌合爲事而作)”고 했다. 현실의 중대한 사회 문제를 직시해서 시가는 시대의 맥락과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고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는 구실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그의 시가는 사회 모든 방면에 걸쳐 폐단을 드러내고 권문귀족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 작품이 많다.
그러므로 백거이의 시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풍유시라고 할 수 있다. <신악부(新樂府)> 50수와 <진중음(秦中吟)> 10수 등의 대표작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 작품은 중당(中唐) 시기 사회 각 방면의 중요한 문제를 반영해 현실의 어두운 면과 백성의 고통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백거이의 한적시는 전원에 은거해 조용히 살아가고자 하는 바람과 자기 자신을 고결하게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많은 작품들이 ‘낙천안명(樂天安命)’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지만, 이런 시가들의 측면에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포함하고 있어, 그가 한적을 추구하는 이유가 어찌할 수 없는 자아 해탈에 있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감상시는 한순간의 시인의 감상을 노래한 것이지만, 종종 깊은 기탁감을 느끼게 해 주고 있다. 유명한 장편 서사시 <장한가(長恨歌)>와 <비파행(琵琶行)>은 인구에 회자되는 백거이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아이들도 <장한곡>을 이해하고 읊을 수 있었고, 오랑캐 아이들도 <비파편>을 부를 수 있었다(童子解吟長恨曲, 胡兒能唱琵琶篇)”고 한 것에서 보듯이 시인 당시에도 이미 크게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수의 장편 시는 서사가 곡절이 있고, 소리와 색채의 묘사가 뛰어났으며 분위기의 홍탁(烘托)과 음률 면에서도 예술적인 성취가 높다. 
잡률시는 백거이의 작품 중에서 작품 수가 가장 많다. 이 중 가장 작품성이 있고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은 경물을 묘사한 서정성 넘치는 짧은 시들이다. 이들 시는 대부분 백묘(白描) 수법을 사용해 짧은 시편 속에서 생동감 넘치는 경계를 드러내고 있어 인구에 회자하는 작품이 많다.
백거이의 시가는 기본적인 풍격이 평이하다. 이는 일상적인 시어를 사용해 일상적인 일을 묘사해서 아주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시의 의미를 느끼게 해 준다는 것이다. 이는 또한 서사와 감정 표현이 자연스럽게 일치해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백거이는 생전에 이미 시명을 날려 중국 각지에 그의 시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도 이후 많이 애송되는 주요 작가가 되었다. 
백거이(白居易, 772∼846)의 자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또는 취음선생(醉吟先生)이다. 일찍이 태자소부(太子少傅)의 벼슬을 지내 ‘백부(白傅)’라고 칭하기도 하며 시호가 ‘문(文)’이라서 ‘백문공(白文公)’이라 부르기도 한다.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자, 문학가다.
정주(鄭州) 신정(新鄭)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전란으로 인해 5, 6년간 유랑하는데, 이때 사회의 모순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덕종(德宗) 정원(貞元) 16년(800)에 진사과에 급제했고, 18년(802)에는 발췌과고시에 갑등으로 합격해 비서성교서랑을 제수받아 원진(元稹)과 함께 관직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후에 시단에서는 이 둘을 ‘원백(元白)’으로 칭하게 된다. 
헌종(憲宗) 원화(元和) 원년(806)에는 교서랑을 그만두고 <책림(策林)> 75편을 지어 주질현위가 되었다. 원화 2년(807)에는 조정으로 돌아와 한림학사가 되었다가 이듬해에 좌습유를 제수받았다. 원화 4년(809)에는 원진·이신(李紳) 등과 함께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을 주도했다. 원화 5년(810)에는 경조부호조참군을 지냈다. 
원화 6년부터 8년(811∼813)까지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관직을 그만두고 하규(下邽)에 머무르게 된다. 원화 9년(814)에 장안으로 돌아와 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가 되었는데, 이듬해에 번진(藩鎭)의 반란이 일어나고 자객이 재상 무원형(武元衡)을 암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백거이는 앞장서서 재상을 살해한 자객을 체포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대신들은 그가 간관의 직무를 뛰어넘는 월권을 했다고 비판한다. 이때에 또 어떤 이가 이 기회를 틈타 그의 어머니가 꽃구경을 하다 우물에 빠져 세상을 떠났는데 <꽃을 구경하다(賞花)>·<새 우물(新井)>과 같은 시를 지어 예교를 어겼다고 모함해 강주(江州)자사(刺史)로 좌천당했다. 
중서사인 왕애(王涯)가 상소를 올려 백거이가 군(郡)을 다스리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하자, 이에 그는 다시 강주사마로 좌천되었다. 이 좌천은 백거이에게 큰 타격을 주어 벼슬을 하고 있으나 본마음은 은거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천하를 구제해야겠다는 젊은 날의 포부를 버리고 홀로 한 몸을 잘 보존해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원화 13년(818) 충주자사가 되었다가, 원화 15년(820)에 헌종이 갑자기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조정으로 돌아와 중서사인이 된다. 조정에서 당쟁이 일어나자 백거이는 정치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고자 외직을 맡겠다고 자청해 장경(長慶) 2년(822)부터 항주·소주자사 등을 지내며 백성의 마음을 얻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된다. 문종(文宗) 대화(大和) 원년(827)에 비서감·형부시랑을 제수받았지만, 그는 낙양(洛陽)에서 벼슬하며 머물 것을 자청한다. 
대화 3년(829) 이후부터 백거이는 낙양에 거주하며 태자빈객·하남윤·태자소부 등의 관직을 지냈다. 낙양에서 백거이는 시·술·선(禪)·금(琴)·산수를 즐기면서 유우석(劉禹錫)과 창화(唱和)해 ‘유백(劉白)’이라 칭해지기도 했다. 무종(武宗) 회창(會昌) 2년(842)에 형부상서를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회창 4년(844)에는 자비를 들여 용문(龍門)에 팔절석탄(八節石灘)을 정비해 물길을 편하게 해 주기도 했다. 회창 6년(846)에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낙양 용문 향산(香山)의 비파봉(琵琶峯)에 묻혔으며, 이상은(李商隱)이 묘지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