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아(伯牙)가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뜻을 가진 백아절현(伯牙絶絃)이다. 거문고 연주에 정통했던 백아의 음악을 그 누구보다도 깊이 이해했던 친구 종자기의 일화가 소개돼있다. 백아와 종자기의 일화를 통해 우리는 이 외롭고 험난한 인생에서 나의 생각과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친구가 있는지, 또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로 살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나를 알아주는 친구, 내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지기(知己)’ 또는 ‘지음(知音)’이라고 한다.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같이 밥 먹고, 수다 떨고, 학교 다니고, 몰려다니는 그런 친구 이상의 의미이다. 나의 가치를 알아주고, 나의 생각을 읽어주고, 말하지 않아도 나의 마음을 다 알아주는 친구, 그런 친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지음’이라는 호칭은 참 귀하다. 이런 친구는 흔하지 않고, 서로에게 이런 존재가 돼주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말은 ‘백아(伯牙)가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에서 유래했다. 『열자(列子)』의 「탕문(湯問)」편에 나오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춘추시대 백아는 거문고 연주를 잘했고, 친구인 종자기(鍾子期)는 그 연주를 듣기 좋아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면서, 높은 산에 오르는 데 뜻을 두자 종자기가 말했다. “좋구나! 우뚝우뚝한 것이 마치 태산(泰山)과 같구나!” 또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연주를 하자 종자기가 말했다. “좋구나! 출렁출렁한 것이 마치 장강(長江)이나 황하(黃河) 같구나!” 백아가 연주하며 생각하는 것을 종자기는 틀림없이 알아냈다.
한번은 백아가 태산의 북쪽으로 놀러 갔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바위 아래서 비를 피하게 됐다. 그는 마음이 슬퍼져 이내 거문고를 잡고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맛비의 곡조를 타고 다시 산이 무너지는 소리를 연주했는데, 곡이 매번 연주될 때마다 종자기는 즉각 그의 뜻을 알아맞혔다. 백아는 거문고를 놓고 감탄하며 말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그대의 듣는 능력은. 그대가 상상하는 것은 나의 마음과 같으니, 내가 어디에서 나의 연주를 숨길 수 있겠는가?”
『열자』에 나오는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난다. 백아는 거문고 연주에 정통한 사람이었고, 친구인 종자기는 그 음악을 그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다. 우리나라에서 판소리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귀명창’이라고 하는데, 백아에게는 종자기가 그런 존재였던 셈이다. 백아는 주로 즉흥곡을 연주했던 모양이다. 이것은 타고난 재주가 아니면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이다. 그런데 그가 자신만의 악상(樂想)을 떠올리며 연주할 때마다 종자기는 그 곁에서 시를 읊조리듯 그 연주에 대한 화답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감상은 백아의 악상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태산에서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연주하고, 종자기가 이에 그 음악이 표현하는 것을 맞춘 일화는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두 사람의 마음이 통했음을 보여준다. 백아는 종자기의 뛰어난 ‘청음(聽音)’ 능력을 극찬하며 “내가 어디에서 나의 거문고 소리를 숨기겠는가?[吾於何逃聲哉?]”라고 감탄했다. 이것은 ‘감탄’이라고 볼 수도 있고 ‘탄식’이라고 볼 수도 있다.(원문의 ‘탄왈(歎曰)’은 ‘감탄하며 말하다’ 또는 ‘탄식하며 말하다’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자신의 연주를 너무 잘 알아듣는 그의 능력에 분명 그는 감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몰래 자신의 마음을 거문고 연주에 의탁해 혼자 음미하고자 해도, 듣기만 하면 다 알아채는 종자기가 있으니 세상 어디에서도 그런 고독한 연주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한 탄식이기도 할 것이다. 백아에게도 숨기고 싶은 비밀스러운 감정이 있을 텐데, 그것을 거문고 연주로 표현하는 순간 종자기에게 들키고 말 테니까.
그러나 감탄이든 탄식이든 백아는 종자기의 존재가 너무 고맙고 기뻤을 것이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신의 음악 세계를 이렇게 완벽하게 이해해 주는 친구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음악을 연주하는 재주만큼이나 가치 있는 것은 그 음악을 제대로 감상할 줄 아는 재주이다. 그래서 우리는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 문학, 건축 등의 분야에서도 그것을 창조해 내는 작가 못지않게 그들의 작품을 알아봐주는 뛰어난 비평가들을 함께 기억한다.
『여씨춘추(呂氏春秋)』 「본미(本味)」편에 그 뒷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마음이 통하는 그들이었는데 어느 날 종자기가 죽었다.(종자기가 죽었다고만 되어 있을 뿐, 언제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는 설명이 없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를 부수고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다. 이제 세상에는 백아 자신으로 하여금 다시 거문고를 연주하게 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훗날 사람들은 절친한 친구를 잃은 슬픔을 ‘백아절현’에 빗대 말하게 됐다.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악기를 매우 소중하게 다룬다. 웬만한 충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딱딱한 케이스에 거대한 악기를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수시로 먼지를 닦아주고 털어주며 관리한다. 내 몸에 잘 맞는 악기는 내 분신과도 같으며, 너무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나머지 악기에 애칭을 붙이는 경우도 있다. 백아에게 거문고란 이처럼 분신과 같이 소중한 물건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종자기가 죽고 나자 그 소중했던 거문고의 줄을 끊고 부수고는 죽을 때까지 연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주옥같은 연주를 해도 이제는 그 소리를 알아줄 종자기가 없으니, 그는 거문고를 연주할 이유와 의미를 잃고 말았다. 늘 말을 하던 사람이 벙어리가 된 것과 다름이 없고, 마라톤 선수가 두 다리를 잃은 것과 다름없다. 백아는, 자신의 연주는 종자기가 들어줄 때에만 의미가 있고 그 가치가 빛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 당시 종자기 외에 백아의 연주를 애호하며 듣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과연 없었겠는가? 분명 있었을 터이다. 그러나 백아는 제대로 듣지 못하는 그 청중 앞에서 연주하기를 거부했다.
『여씨춘추』에서는 이 이야기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이 이어진다. “거문고만 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 현자(賢者) 역시 이러하다. 비록 현자가 있다 하더라도 예(禮)로써 그를 대우해 주지 않으면 무엇 때문에 충성을 다하겠는가? 이것은 마치 마부가 좋지 않으면 천리마라도 저절로 천 리를 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것인가. 그러나 아무리 천리를 달리는 재주를 가진 말이라 해도 그 재주를 발견하고 제대로 발현할 수 있도록 알아봐주고 도와주는 백락(伯樂)이 없으면, 결국은 보통의 말보다 못한 처지로 전락해 쓸쓸하게 죽어간다고 한유(韓愈)는 그의 글 「잡설(雜說)」에서 설파했다. 이렇듯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모든 존재는 그에 걸맞는 상대, 지도자, 친구를 만나야 한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아주고, 자신의 마음을 읽어주는 친구는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이 행복한 삶을 누리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조건은 ‘친밀한 인간관계’이다. 이해(利害)에 따라 만나고 헤어지는 관계가 아닌, 그냥 ‘네’가 ‘너’이기 때문에 좋아하고 사랑하는 그런 관계 말이다.
내 마음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백아 역시 그런 순간마다 더욱 거문고 연주에 몰입했을 것이다. 언어로 나의 마음이 다 표현되지 않더라도 나의 얼굴을 보고, 내가 무심코 한 말을 듣고, 나의 지나가는 한숨을 듣고, 내가 쓴 글을 읽고,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 나의 노래를 듣고, 나의 연주를 듣기만 해도 나의 생각과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친구가 있는가. 또 나는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로 살고 있는가. 종자기 같은 친구가, 내 마음의 소리를 알아주는 ‘지음’이 나에게도 있다면 이 외롭고 험난한 인생에서 참 감사할 일이다.
한림학보/강지희(교양기초교육대학 ·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