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8일 토요일

대구-조선 5대 서원 도동서원 道東書院 가을보다 맑은 선비의 마음, 낙동강이 절하다



도동서원을 400년간 지켜온 느티나무.
도동서원을 400년간 지켜온 느티나무.
“대구로 놀러 가자고?” 대구시민들이 들으면 버럭 화를 낼지 모르지만 그동안 대구는 “볼 것도, 먹을 것도, 즐길 것도 없는 내륙도시” 이미지가 강했다. 팔공산과 동화사가 있긴 하지만 꼭 들르고 싶고, 꼭 들러야 하는 전국적인 명소가 드문 게 사실이다. 물론 여행자의 시선으로 본 품평이다. 하지만 직접 대구에 가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눈앞에 둔 도동서원(道東書院)은 건축미가 놀랍다. 김광석 거리의 가을 정취는 단풍산보다 짙고 깊다. 근현대가 절묘하게 녹아 있는 골목길을 거닐다 왁자한 재래시장에서 얼얼한 국밥 한 그릇 비우고 나면 대구가 물을 것이다. “이제 됐나?”
■ 서원에서 인성을 배우다
“서원은 조선시대 최고 실력을 갖춘 스승을 모시던 학교입니다. 도동서원은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조선 5대 서원 중 한 곳이었으니 서울의 최고 명문대학이라고 보면 됩니다.”
문화해설사 송은석씨(55)는 “서원은 사대부 집안의 이름 있는 자손들이 공부하던 곳”이라며 “도동서원은 소박하면서도 간결한 조선 서원 건축의 백미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대구 달성구 구지면 도동리 35번지. 멀리서 보니 도동서원은 낙동강이 품에 안고 있는 아담한 학교였다. 서원에 도착하자 커다란 은행나무가 길을 막아선다. 키 25m에 둘레가 8.7m나 되는 은행나무는 수령이 400년이라고 했지만 생김새가 1000년은 넘어 보인다. 서원 정문인 수월루를 지나니 ‘환주문(喚主門)’이 보였다.
학교마다 건학이념이 있듯 유교의 건축물에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도동서원에서 가장 매력적인 건물인 ‘환주문’은 ‘주인을 부르는 문’으로 하늘에서 부여받은 천성을 잠시도 놓치지 말고, 내 안의 주인을 불러 깨우라는 뜻이 담겨 있다. 나를 스스로 깨우쳐 수양하면 최고 경지인 성인은 못돼도 그 아래 군자와 현인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도동서원 중앙에 수월루, 환주문, 중정당, 내삼문, 사당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다.
환주문으로 오르는 10여개의 계단은 폭이 좁고 엉성했다. 문 높이가 겨우 1m69에 불과했다. 도포 자락을 잡고 갓을 쓴 조선 양반들이 문을 넘기가 쉽지 않았겠다. 아무리 똑똑한 선비라 해도 큰 스승을 모셨으니 경건하게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라는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조선시대 유생들은 서당 공부를 마치고 중등교육을 받았다. 서원과 향교가 그 역할을 했다. 서원은 조선 성리학의 정수가 서린 곳으로 인재를 키우고 선현에 제사를 지내던 사설기관이다. 지방 공립인 향교가 도심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기관이었다면, 사립인 서원은 산속에 자리 잡고 학문을 익히고 토론하는 데 열중했다. 도동서원은 조선시대 5현인 이황, 조광조, 정여창, 이언적의 수장으로 불리는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환주문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환주문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개혁주의자 조광조의 스승으로 유명한 김굉필은 실천을 중시한 ‘소학동자’였다. <논어> <맹자> <대학> 대신 초등학교 윤리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소학>을 파고들었다. 인성이 최고의 덕목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리라.
계단을 조심조심 올랐다. 옛 선비들은 걸음을 걸을 때도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 유교에서 왼쪽 발은 양, 오른쪽 발은 음의 세계다. 계단을 오를 때는 도포 자락을 잘 잡고 왼발을 먼저 올린 다음 모둠발을 한 뒤 다시 왼발을 올려야 한다. 쉬운 게 없었지만 더딘 걸음에서 옛 선비들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었다.
토담은 새색시처럼 정갈했다. 고개를 숙이고 문으로 들어서다 불룩 튀어나온 돌에 넘어질 뻔했다. 배움터에 들어설 땐 삿갓 쓴 머리도, 도포 아래 발도 조심하라는 경계석이었다. 마당에 도착하니 스승이 다니는 중간 길에 거북이 한 마리가 두 눈을 부릅뜨고 앉아 있었다. 선비들 식은땀깨나 흘렸겠다.
■ 서원에서 건축을 배우다
도동서원은 다른 서원과 달리 중정당 나무 기둥에 새하얀 창호지가 둘러져 있다. 햇빛과 달빛을 받은 창호지는 밤낮없이 도동서원을 반짝반짝 빛나게 하고, 낙동강을 지나는 배들은 도동서원임을 알고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단청 없는 강당의 퇴계 이황 편액이 눈길을 잡아끈다. 1568년 비슬산 기슭에 세워졌다가 불에 타 1601년 지금의 자리로 도동서원을 옮길 당시 퇴계는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제자들이 퇴계 살아생전 글자를 뽑아 편액을 썼다. 퇴계는 전국에 서원이 생길 때마다 시를 짓고 편액을 썼다. 후세들은 “퇴계가 살아 계셨다면 분명히 직접 현판을 내렸을 것”이라고 전했다.
김굉필 선생을 모시는 사당에서 바라본 중정당과 수월루. 중정당은 강의가 이뤄지던 강당이고 수월루는 도동서원의 정문이다.
김굉필 선생을 모시는 사당에서 바라본 중정당과 수월루. 중정당은 강의가 이뤄지던 강당이고 수월루는 도동서원의 정문이다.
도동서원의 강당인 중정당에 오를 땐 기단 조각품을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지붕의 기와 한 장, 기단에 쓰인 돌덩어리의 색깔과 모양이 모두 다르다. 4각, 5각, 6각은 물론이고 12각형 돌까지 빈틈없이 쌓여 있다. 조각보를 만들어도 이보다 정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맞춰진 기단석에는 용머리 4개가 붙어 있었다. 3개는 진짜가 아니라고 하는데 개보수한 용머리는 누가 봐도 가짜였다. 기단석 한쪽은 다람쥐가 연꽃을 안고 올라가고, 다른 쪽은 내려오고 있었다. 오른쪽 계단은 올라갈 때, 왼쪽은 내려갈 때 이용하라는 뜻이다.
신발을 벗고 중정당에 올라섰다. 대쪽 같은 선비들이 의관을 정제하고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강당 양쪽에 있는 스승의 방문이 특이했다. 창호지가 창살 바깥에 붙어 있었다. 방 안 중요한 공간 쪽을 창호지로 막는 게 일반적인데 거꾸로 발라놓았다. 책 읽는 강당을 스승의 방보다 더 중요한 공간으로 보았던 것이다.
지금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보였다. 좁은 방에서 10여명이 기거했는데 동재는 양반 자제와 상급생들이, 서재는 평민과 하급생들이 머물던 곳이다. 언뜻 보기엔 비슷해 보였는데 내려가보니 영 딴판이었다. 동재에는 공부를 하다 피곤하면 쉴 수 있는 툇마루가 있었고 멋들어진 원기둥에 마루와 벽은 나무로 돼 있어 시원했다. 건너편 서재는 흙벽으로 돼 있어 답답하고 툇마루 대신 아궁이가 드러나 있었다.
다람재에서 바라본 도동서원.
다람재에서 바라본 도동서원.
도동서원을 뒤로하고 소나무 숲길을 따라 구불구불 다람재에 올랐다. 멀리 정연하게 앉아 있는 도동서원이 보인다. “禮義之始(예의지시), 在於正容體(재어정용체), 齊顔色(제안색), 順辭令(순사령)(예의의 시작은 몸을 바르게 하고 얼굴빛을 단정하게 하며 말을 온순하게 하는 데 있다).”(<예기>) 400~500년 전 이 먼 길을 걸어서 학문과 예를 익혔을 선비와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경향신문